![]() 수원화성 북쪽 성벽 지난 10일 (사)화성연구회 모니터링위원회는 남한산성 답사를 다녀왔다. 남한산성 북문인 전승문에서 출발해 연주봉옹성, 서문인 우익문, 수어장대, 남문인 지화문까지 답사하고 남한산성 행궁도 둘러봤다. 무더위 속에서도 남한산성의 지리적 위치, 역사적 가치와 성벽의 구조 등을 알아봤다. 수원화성과 비교하면서 성벽의 복원 및 보존상태 등을 관찰했다. 수원화성만 공부하고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수원화성이 가장 뛰어나며 우수하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성곽을 시대별 특징, 지역적 특징과 성벽, 성문, 옹성, 치, 암문, 여장 등의 구조를 비교하면 수원화성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수 있다. 문화유산을 비교 답사하는 이유이며 시야를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 수원화성 용도 수원화성과 남한산성은 여러 측면에서 비교할 것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남한산성은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수원화성은 축성의 전체적인 기록인 화성성역의궤를 가지고 있고, 남한산성은 삼국사기에 축성 기록을 가지고 있다. 수원화성은 1794년 1월부터 성 돌을 뜨면서 축성을 시작해 1796년 9월에 완성하고 10월 16일 준공잔치인 낙성연을 열었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처음 성을 쌓았고 주장성(晝長城)이라 했다. 성의 둘레는 4,360보라고 성곽의 구체적인 규모를 밝혔다. 수원화성의 축성 배경에는 당시의 정치적인 역학관계, 정조대왕과 사도세자의 관계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의 축성 배경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하제일의 요새와 같은 성곽을 축성한 것이다. 기록을 통해 축성의 배경도 알 수 있다. ![]() 남한산성의 치 수원화성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남한산성은 고려시대에 몽골과의 전쟁, 조선시대에 청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난공불락이었음을 입증했다. 병자호란 후 전쟁을 통해 성곽의 취약한 부분을 보완했다. 원성의 동쪽 봉암과 한봉을 감싸는 외성을 쌓았고 남쪽 성곽 맞은편의 봉우리인 검단산에 돈대 형식의 신남성을 축조했다. 병자호란 당시 이곳을 청나라 군대가 차지해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댔다. 옹성이라 불리는 시설로 서북쪽에 연주봉 옹성, 남쪽에 제1 남옹성, 제2 남옹성, 제3 남옹성, 동쪽에 장경사신지 옹성을 쌓았다. 옹성 끝에는 포대를 설치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남한산성의 옹성 시설은 수원화성의 용도로 다시 태어났다. 정조대왕 당대에도 남한산성을 수축했기 때문에 수원화성 축성 당사자들도 남한산성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원화성의 성벽은 팔달산 위 남쪽 끝에서 동쪽으로 꺾인다. 꺾이는 곳에 서남암문과 포사를 설치하고 남쪽으로 용도를 만들었다. 용도 끝에 서남각루를 설치해 적이 먼저 차지하는 것을 방비한 것이다. 남한산성에 5개의 옹성 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수원화성의 용도가 우리나라 성곽에서 유일하고 독특한 형태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 남한산성의 연주봉 옹성 순조 때 발간한 『만기요람』책에는 유성룡의 산성론을 인용해 "옛적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여러 신하에게 계책을 물으니 모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할 수가 없습니다. 그 뒤에 거란이 고려를 치려 함에 그의 신하가 간하기를 고려사람은 산성의 새처럼 산성에 깃듭니다. 대군이 가서 공격하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제대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입니다."라는 기록을 통해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국토를 보위하고 적을 방어하는 데 모두 산성을 가장 유리하게 이용하였고 적들이 두려워 한 것도 역시 산성에 있었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성을 관리하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주민과 군인들이 식량을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가 성을 지키면서 적이 지치고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반격하는 작전인 청야입보(淸野入保, 들을 깨끗이 비우고 성에 들어가 싸운다는 뜻) 전술을 쓰면서 거점을 방어했다. ![]()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거점에 자리하고 있어 최고의 산성 역할을 해왔다. 정약용 선생은 민보의라는 저서에서 '전통적으로 산성을 중시해온 우리나라는 산성 축조에 가장 적합한 곳을 고로봉 지형이며 대표적인 것이 남한산성이라고 했다. 남한산성은 동쪽은 봉암, 서쪽은 청량산 등 계곡을 끼고 있는 동문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성곽을 해발 400~500m의 능선을 따라 축조했다. 우리나라 성곽이 일부 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성곽 형식과 가장 큰 차이는 우리나라 산성은 유사시에 산성 주변의 모든 백성이 다 함께 들어가 목숨을 걸고 싸우기 위한 것인데 반해 외국의 성곽은 권력자와 주변 인물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축조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곽은 백성을 위한 시설이었다. ![]()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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