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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 안재홍 선생 43주기 추모식 열려...
3월 1일 토요일 오전 11시 평택시 북부문예회관에서 선생의 뜻 기려...
2008-02-26 14:29:39최종 업데이트 : 2008-02-26 14:29:39 작성자 : 시민기자   김준호

한국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언론인, 사학자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평화통일에 헌신하셨던 「민세 안재홍선생 43주기 추모식」이 3월 1일 오전 11시 평택시 북부문화회관에서 (사)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진현) 주관 개최된다.
 
이날 추모식에는 수원보훈지청 김재신 보훈과장, 정장선․우재항 통합민주당 국회의원, 송명호 평택시장 등 각계인사 및 평택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선언서 낭독, 민세약전 및 어록 봉독, 기념사업회장 및 각계인사의 추모사, 추모시 낭송, 분향, 3․1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민세 안재홍선생은 경기 평택에서 출생하여 1912년 일본 동경 유학중 조선유학생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1913년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중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 주필로 있으면서 신간회 총무간사로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28년 12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민중대회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되었다. 

또한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이 이바지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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