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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칼럼] 옆의 발견과 실현
정수자 시조시인
2022-01-19 11:05:21최종 업데이트 : 2022-01-19 11:04:49 작성자 :   e수원뉴스

인문칼럼


 

옆이 있었네. 문득 보는 옆의 힘이 크다. 앞이 아닌 '옆으로 나란히'를 다시 본다. '나란히'에는 '높낮이나 우열의 차이가 없게'라는 뜻도 있으니 옆과 함께의 자세를 일깨운다. 나란히 가거나 어깨를 겯고 가는 마음이 더 든든하게 닿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옆의 마음에는 귀의 역할이 큰 듯하다. 양 옆에 달려 있는 두 귀가 옆의 말을 잘 들으라는 귀띔 같다. 눈도 둘이지만 옆을 보려면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귀는 그냥 잘 들으면 옆의 기분까지 짐작할 수 있다. 두 팔도 그런 역할을 더 부여받은 게 아닐지. 신체 부위에서 유일하게 360도 움직임을 장착한 팔이 제일 크고 넓게 옆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발도 나란히 맞출 수 있지만 발을 끼고 걷지는 못하니 팔로 가능한 옆의 헤아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옆에는 본래부터 좌/우가 있었다. 왼편/오른편이라고 정해놓은 이 영역은 사상과 무관한 역할이자 표현이다. 정치적 신념과도 무관하게 그냥 둘로 나뉜 신체 구조상의 기능이고 차이라 하겠다. 그런 좌/우도 몸의 방향을 틀어 다시 보면 앞/뒤로 바뀐다. 그 자세를 한 번 돌아서면 앞/뒤가 좌/우로 또 바뀌니,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옆을 두루 살피는 데도 편리한 셈이다. 자세에 따라 어느 쪽이든 나의 다정한 옆으로 둘 수 있다면 더 좋은 태도겠다.

 

방향을 떠나서 봐도 옆은 든든한 말이다. 동반이니 평등 같은 정신도 더 느껴진다. 수직보다 수평의 표현이라 벗, 동료, 회원 같은 함께의 지향이 크게 닿는다. 워낙 치열한 경쟁사회라 간혹 옆을 사다리 삼는 사람도 있지만, 옆의 살핌에서 나란히라는 가치도 더 실현된다. 이를 나란히 정신이라고 부르면 세상은 그런 바탕을 딛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넓게 보면 인류애로 발휘될 수도 있는 게 옆의 확산인 것이다. 그렇듯 나란히 정신을 바탕 삼으면 더 살만 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옆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힘들 때다. 갑자기 아플 때, 옆이 있으면 문제 해결이 쉬워진다. 흔한 예로, 한밤에 쓰러지는 일이 생기면 누구든 옆이 있어야 회생할 가능성이 높다.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가 돼도 옆의 지극한 도움이 있으면 회복이 쉬운 것이다. 그렇게 옆을 지키는 사람이 마지막까지도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옆을 잘 두지 못하면 더 고독한 혼자 마감으로 갈 우려가 높은 것이다. 요즘 더 늘어난 고독사야말로 옆의 부재를 말없이 증언하는 사례다.

 

옆의 힘은 동행이라는 말에서도 새롭게 다가온다. 걷기조차 어려운 상태의 옆을 지키며 가는 동행은 오래 전부터 사람다운 노릇으로 높이 쳐온 실천이다. 그렇게 보면 동행이란 나란히 정신의 아름다운 실현이다. 여기에 더 너른 동행을 넣어서 보면 연대가 있다. 시대정신으로 확산돼온 연대야말로 바로 옆들과의 공존인 것이다. 나의 옆을 살피는 데서 나아가 비슷한 옆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헤쳐 가려는 연대는 가장 넓은 옆과의 공존이다. 이런 연대가 사람을 넘어 자연으로 넓어지면 더할 나위 없는 지구적 옆과의 공생이 될 것이다.

 

옆을 생각하는 마음, 옆을 배려하는 자세가 소중한 때다. 거리 두기도 옆의 차단인 듯싶지만 실은 옆을 살리자는 배려의 실천이다. 오늘도 옆을 더 살피며 마음은 더 가까이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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