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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세세연년(歲歲年年) 이어져야 할 성신사 고유제
김우영 언론인
2021-05-14 10:33:35최종 업데이트 : 2021-05-17 13:47:54 작성자 :   e수원뉴스 윤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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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성연구회는 지난 15일 오후 3시 팔달산 중턱에 있는 성신사(城神祠)에서 고유제를 지냈다. 원래는 매년 1월이나 2월초에 해오던 행사였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졌다. 안할 수도 없는 화성연구회의 전통인지라 늦었지만 적은 인원만 모여 간략하게 제를 올렸다.

 

물론 예전처럼 격식을 차려 제물을 올리고 음복을 하지는 못했다. 체온 측정과 손 소독을 하고, 회원 간 간격을 멀찍이 두는 등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화성연구회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인 뒤풀이도 하지 못했다, 뒤풀이를 이처럼 강조한 것은 모든 사업들의 아이디어가 이 자리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또 각 방면의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인 만큼 내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대단히 흥미롭다.

 

나는 요즘 이런 농담을 한다. "왜 뼈 빠지게 돈 들이고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나. 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해결 될 것을."

 

화성연구회가 성신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00년 무렵이다. 내가 'e수원뉴스' 전신인 '늘푸른 수원' 주간을 맡고 있을 때다. '화성성역의궤'를 읽다가 '성신사는 팔달산 오른쪽 기슭 병풍바위(屛巖) 앞 유좌묘향(酉坐卯向),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병진년(1796년) 봄 특교(特敎)로 집터를 잡으라는 명령이 계셔 택일하여 사당을 지었다.'라는 기록을 보게 됐다. 정조대왕은 "화성의 준공을 앞두고 제일 먼저 해야 할일은 좋은 날을 가려 성신묘(城神廟)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때에 맞춰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에게 수(壽)를 주고 복(福)을 주며 화성이 만세토록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제문(祭文)을 직접 짓고 향을 내렸다.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성신사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화성연구회를 만든 장본인인 김충영 당시 수원시 도시계획과장을 찾아갔다. 이 과정은 김충영 박사가 수원일보에 연재 중인 '김충영의 수원 현미경' 5월 10일자에서 밝혔다.

 

"성신사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당시 '늘푸른수원' 김우영 편집주간이었다. 그는 성신사가 화성전도에 화성행궁 뒤편 팔달산 왼편 기슭에 위치하며 병풍바위 앞에 있다고 했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유좌묘향을 그려볼 때 성신사의 위치로 추정할 곳은 강감찬 장군동상 위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화성연구회는 2001년 신년 행사로 성신사 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올리기로 했다. 장소는 강감찬 장군 동상 옆 잔디밭에서 약식으로 진행했다. 이후 화성연구회는 매년 첫 모임 때 팔달산 강감찬 장군 동상 옆 잔디밭에서 고유제를 올렸다."

 

고유제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진1) 2001년 성신사 터를 답사하고 있는 화성연구회 회원들/사진 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사진1) 2001년 성신사 터를 답사하고 있는 화성연구회 회원들/사진 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사진2) 필자가 쓴 2002년 고유제문/사진 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사진2) 필자가 쓴 2002년 고유제문/사진 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성신사가 들어선 곳은 팔달산에서 가장 좋은 명당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도 명당자리를 알아봤다. 그래서 성신사를 헐고 이 자리에 신사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수원사람들이 크게 반발하는 바람에 팔달산의 남쪽인 현재의 수원시민회관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성신사는 언제 사라졌을까. 아마도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사라졌을 것이다. 일제가 민족정기와 왕기가 깃든 화성행궁을 파괴하면서 함께 없앴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성신사가 1899년 편찬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도 소개되고, 앞부분에 밝힌 것처럼 일제가 헐고 신사를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일제 강점기에 훼철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흐르고 1971년 강감찬 동상이 들어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국조상건립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수원과 강감찬 장군은 역사적인 연관이 없다. 그냥 수원에 강감찬 장군이 '배정'됐을 뿐이다.

  2002년 열린 성신사 고유제/사진 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2002년 열린 성신사 고유제/사진 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이후 화성연구회는 각종 문헌 자료 연구를 통해 이 자리가 성신사 위치였음을 확인하고 매년 연초 '성신사 중건을 위한 고유제'를 지내고 중건 캠페인을 펼쳤다. 2004년 지표조사 때는 '왕(王)'자가 새겨진 기와 파편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꾸준한 노력의 결과 수원시는 성신사를 중건 복원하기로 결정했고 기업은행도 건립기금을 쾌척했다.

 

그리고 2007년 11월 5일 성신사 복원을 위한 동상 이전 공사를 했다. 강감찬 동상은 36년간 있던 자리에서 광교공원으로 옮겼다.

 

수원문화원이 발행하는 『수원사랑』에도 쓴 바 있지만 동상 이전에 앞서 10월23일 열린 화성연구회의 고유제 때는 별안간 수백마리의 비둘기들이 떼로 날아와 행사장을 선회하는 장관을 이뤘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성신의 감응이 아닐까"라며 신기해했다.

 

성신사 준공식은 2009년 10월8일에 열렸다. 그 후에도 화성연구회의 고유제는 한해도 거른 적이 없다. 앞으로 화성연구회 뿐 아니라 수원시, 수원시의회, 각 기관·단체들이 중요한 행사나 의미 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이곳에서 고유제를 지내게 되길 바란다. 연년세세(年年歲歲) 성신사 고유제가 수원의 문화·역사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우영 언론인 프로필 및 사진

 

 

 

김우영, 언론인, 성신사, 정조, 화성연구회, 팔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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