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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3·1’ 이름값을 하는 삼일공고 학생들, 장하다!
김우영 언론인
2021-08-31 16:53:54최종 업데이트 : 2021-08-31 16:53:06 작성자 :   e수원뉴스 윤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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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성연구회 ㄱ이사가 전화를 했다. 새로운 소식이 있는데 아느냐며 삼일학교에 임면수 선생과 이하영 선생의 흉상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윤숙 조각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날씨는 무더웠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으로 종로 여민각에서 수원천을 따라 걷다가 화홍문에서 동쪽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향중, 삼일상고, 삼일공고 세 학교 교문이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는데 삼일공고는 맨 동쪽에 있다.

 

코로나19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임면수·이하영 선생의 흉상을 보러왔다고 설명하니 들어가 보라고 한다. 두 분의 흉상은 정문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나란히 있다.

삼일공고 정문 옆에 세워진 독립투사 임면수 선생과 이하영 선생의 흉상/사진 수원시 제공

삼일공고 정문 옆에 세워진 독립투사 임면수 선생과 이하영 선생의 흉상/사진 수원시 제공
 

기특하게도 이 흉상건립을 기획한 것은 학생들이라고 한다. 삼일공고 학생회가 일제 강점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설립자 임면수·이하영 선생의 뜻을 이어받고 민족학교의 자부심을 이어나가기 위해 흉상 제작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것이다.

 

흉상 옆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이자 수원 지역 대표적 민족학교임에도 설립자를 기릴 만한 것이 학교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삼일공고 학생회를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됐다는 건립 경과가 기록돼 있다.

 

학생회는 매일 아침 등굣길에 '등교 맞이 캠페인', '모금을 위한 행운의 뽑기 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면서 흉상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학교도 적극 나섰다. 교직원들의 모금과 함께 학교재단·동문을 설득했다.

 

광복70주년이었던 지난 2015년 8월 15일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의 필동 임면수 선생 동상 건립을 주관한 경기르네상스포럼도 100만 원을 기부했다.

 

이처럼 학생들과 동문, 학교 교직원, 재단, 지역사회의 기부로 마련된 성금으로 조각가 이윤숙씨에게 흉상 제작을 의뢰했고 18일 흉상 제막식을 하게 된 것이다.

 

제막식에는 학생들과 학교·재단 관계자, 경기르네상스포럼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특히 임면수·이하영 선생의 손자인 임병무·이종협 씨도 참석해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됐다는 전언이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하루 전에 미리 다녀갔다고 전해 들었다.

 

제막식에 참석했던 경기르네상스포럼 한준택 상임이사는 "행사에 참석하신 손자 임병무 선생과 이종협 선생의 얼굴에서 두 분의 모습을 뵈었고, 행사에 참석한 학생들의 마음속에서 두 분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하영 선생의 손자 이종협 씨는 내가 만나 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 임면수 선생의 손자 임병무 씨는 할아버지 얼굴을 꼭 빼닮았다. 임병무 씨는 시인인데 10여 년 전 쯤 뇌수술을 받은 후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인의 고생이 참 많다.

 

나와 만난 것은 30년이 넘는다. 지역의 중견 사진작가 ㅈ선생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그의 첫시집 작품해설을 쓴 인연으로 친교를 이어오고 있다.

 

어느 땐가 자기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 했는데 친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이자 삼일학교 설립자라는 말을 했다. 삼일학교 교정에 있는 산소(후에 국립현충원으로 이장)가 바로 할아버지의 유택이라는 것이다. 먼저 깜짝 놀랐고 뒤이어 그간의 무심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후 틈만 나면 임면수 선생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임면수·이하영 선생은 1903년 대한제국 말기 나중석 등 수원지역 유지들과 뜻을 모아 '삼일학당'을 설립했다. 이들은 "어서 배워서 국가 독립을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며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학교 부지로 내놓았고, 수원의 부호 강석호는 거금을 기부했으며 나혜석의 사촌 오빠로써 수많은 토지를 자진해 무상 분배한 나중석도 부지 900여평을 기증했다.

 

임면수 선생은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 분교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민단 결사대 활동을 하며 항일투쟁을 이어가다가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당하며 옥살이를 하다가 위중한 상태가 되자 일제는 선생을 석방했다.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1930년 11월 29일 5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선생의 아들 우상도 독립운동에 가담, 1919년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마련하고 만주로 돌아가다 동상을 입어 객사했다.

 

만약에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교육사업에 가산을 털어 넣지 않았더라면 임병무 씨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도 지금과 같은 가난의 대물림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목사였던 이하영 선생은 임면수 선생과 함께 '삼일학당'을 설립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진남포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신흥리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교인, 학생, 일반인 500여명이 교회로 모였다. 그의 주재로 고종황제 봉도식을 먼저 거행한 후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하영 목사는 앞장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했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수명의 살상자가 발생하는 등 치열한 만세시위였다. 이로 인해 혹독한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이 학교 학생들이 자랑스럽다. 일제의 강제 점령을 미화하고, 심지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발적인 매매춘을 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토착왜구'들까지 설치고 있는 현실에서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은 박수를 받아야 한다. 장하다. 삼일공고 학생들, 역시 '3·1'이란 이름값을 하는구나!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김우영 프로필 및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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