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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장안문과 화서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김우영 언론인
2022-11-21 10:00:24최종 업데이트 : 2022-11-21 10:00:06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이게 뭐여? 누가 이 귀중한 문화재에다 구멍을 팠네?"

"이걸 왜 이렇게 했대?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장안문 안쪽을 구경하던 관광객 몇이 옹기종기 모여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하, 이 오지랖.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 바위구멍은 성혈(聖穴) 또는 암혈, 굼, 알 바위, 컵 마크(cup-mark), 큐플(cupule) 등으로 불리며 주로 성스러운 의식을 행한 흔적"이라면서 "민간신앙을 근거로 아들을 바라는 의례와 관련지어 성과 다산을 의미하는 의례 행위"였다고 말해줬다.

 

장안문 성안 쪽에 있는 성혈들(사진/김우영)

장안문 성안 쪽에 있는 성혈들(사진/김우영)

 

 

"그 옛날 여인들이 여기에 쪼그리고 앉아 돌을 비비면서 아들 출산이나 남편의 과거 합격과 가족의 무병장수 등을 기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고 깊었으면 돌이 이렇게 깊게 파였을까요"

 

관광객들이 내 말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이 돌구멍도 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문화유적이네요"라는 한 관광객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장안문에 성혈이 있을까요? 다른 문에도 이런 것이 있나요?"

 

오, 상당히 학구적인 사람이구나.

 

성혈은 화서문에서도 발견된다. 화서문 안쪽 문루 올라가는 계단 두 군데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화서문 성혈은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아주 오래전인 것 같은데 시멘트인지 석회인지 모르지만 단단하게 덮어 씌웠다. 그분은 아마도 누군가가 훼손한 것이라고 여겨 '보수'를 한 것이리라.

 

 

화서문 계단에 파인 성혈. 누군가가 시멘트로 메웠다.(사진/김우영)

화서문 계단에 파인 성혈. 누군가가 시멘트로 메웠다.(사진/김우영)

 

 

성혈은 장안문과 화서문에서만 발견됐다. 팔달문과 창용문에서는 보지 못했다. 왜 그런 것일까? 나도 궁금했다.

 

혹시 정조대왕 능행차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

 

정조대왕은 1789년 10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재임기간 매년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

 

한양에서 지지대고개를 넘어 장안문을 통해 들어오는 길이었는데, 한번은 화서문을 통해 수원에 입성했다. 1797년 정조 대왕 행렬은 장릉을 들러 김포 관아에서 일박하고, 부평을 지나 광명 영회원을 들러 수암동 안산행궁에서 다시 하루 머문 뒤 다음날 화서문을 통해 수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경기도문화원연합회가 2014에 발행한 '경기향토사학' 제19집에 수록된 '1797년 8월 행행(行幸)과 정조사적(正祖史蹟) 고찰(考察)-시흥지역을 중심으로' 논문은 '정조실록'을 토대로 당시 행행경로를 지금의 지리로 추측해놓았다.

 

우리 수원의 (사)화성연구회 등 관심 있는 연구자들과 함께 일부구간이라도 걸어 볼 필요가 있겠다.

 

 

창덕궁-양천행궁-장릉-김포행궁-부평행궁-부평역(1호선)으로 남하 우회하여 인천광역시 십정2동 방향(동암역-1호선)-간석오거리 옛 한양, 인천 길(수인로 42번) 합류(인천대공원)-상아산 김재로묘 지나(인천, 시흥경계) 소래산 앞길(하연 묘 계란마을 앞길)-신천사거리-중림역(과림동 중림)에서 목감천을 넘어(범안로)-광명시 노온사동 영회원을 들르고 나와-중림역도(금오로 397번)로 남하-무지내 감조개 넘어 수인로 합류(금이사거리), 남하-조남동 장군재(장유, 장선징 묘) 앞을 지나(시흥, 안산경계)-안산관아(행궁)-수인로(안산 관아 앞 넓은 곳에서 민원청취)-반월을 지나-수원 관문 밖 5리 지점-수원 구포(화성시 비봉면 구포리 일대)-옛 서문로(화성 화서문 통해 남하)-기존 필로로 합류-현륭원)

 

 

이처럼 장안문과 화서문은 정조대왕이 수원으로 입성했던 중요한 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 문을 신성시했던 것이 아닐까. 신앙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떤 여인은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가족이 급제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그 단단한 화강암이 닳아 구멍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성혈은 수원화성박물관 앞에 있는 비석들 가운데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도 남아 있다.

 

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2)은 조선조 문신으로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지만 순조 1년인 1801년에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수원군읍지'의 '유수 선생안'에 채제공-이명식-조심태에 이어 수원유수로 임명됐다가 파면됐다는 기록도 있다.

 

 

화성박물관 앞에 있는 서유린 선정비에도 성혈이 있다.(사진/김우영)

화성박물관 앞에 있는 서유린 선정비에도 성혈이 있다.(사진/김우영)

 

 

그런데 왜 이 비에만 성혈이 남아있는 것일까? 파면 당하고 심지어는 유배까지 간 인물인데 말이다.

 

1797년 9월 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며 이듬해엔 조세를 면해 줄 것을 아뢰자 정조대왕이 이를 승낙한 일도 있다.

 

선정비는 어질게 다스린, 그야말로 선정(善政)을 한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백성을 협박해 돈을 내게 하거나 자신의 재물을 들여세운 '억지 송덕비'도 있다.

 

그러나 비석 아래에 많은 성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서유린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어질고 능력 있는 목민관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답사 전문가인 염상균 화성연구회 이사는 "작은 돌(자석子石)을 지니고 와서 기단석에 돌려가며 비나리를 하던 모습도 눈에 잡힐 듯하다. 이 성혈들을 보노라면 삼신할머니에게 빌어대던 절박한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성이 성으로서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이렇듯 민중들의 소박한 신앙의 대상으로서도 자리 잡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도 그렇다. 장안문을 지날 때마다 같은 심정으로 이곳에 잠시라도 머물러 시선을 주고 간다. 그 간절한 기원들이 모두 이루어졌기를 바라면서.



저자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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