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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아들과 남편 나라에 바친 ‘독립의 어머니 전현석’
언론인 김우영
2019-04-12 17:56:37최종 업데이트 : 2019-04-23 15:27:41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아들과 남편 나라에 바친 '독립의 어머니 전현석'

[공감칼럼] 아들과 남편 나라에 바친 '독립의 어머니 전현석'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침략의 원흉인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영웅이다. 이때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도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듬해 3월 26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했다.

몇 해 전 중국 대련 뤼순 감옥에 가서 안의사가 갇혀 있던 방과 형장을 둘러보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내가 존경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도 여기 수감돼 있다가 사망했다. 뤼순 감옥은 서대문형무소와 비슷한 구조이고 느낌도 같다.

안의사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조여사가 직접 지은 수의와 함께. 수감자들이 입는 수의(囚衣)가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수의(壽衣)였다. 편지는 다음과 같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다. 항소하는 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 어떤 어머니가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을까? 또 다시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이 위대한 어머니는 아들이 순국한 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활동했다.

수원에도 조마리아 여사 못지않은 위대한 독립의 어머니가 계셨다. 남편과 아들 모두 독립투쟁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본인은 하루에 대여섯 번씩 독립군들에게 밥을 지어먹이고 빨래를 해줬으며 해진 옷을 꿰매줬다. 만주의 독립군 치고 이 분이 해준 밥을 안 먹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독립의 어머니'라고 불렸다.

독립의 어머니 전현석 여사

독립의 어머니 전현석 여사


전현석(全賢錫) 여사! 독립투사 필동 임면수 선생의 부인이다. 임면수 선생은 수원에서 태어나 삼일학교 설립 등 교육활동과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활동 등을 했으며 나라를 찾기 위해 1912년 2월 엄동설한에 어린자녀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삼일여학교(현 매향중·고)부지와 집터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결단의 뒤에는 전현석 여사가 있었다. 어떤 아내가 가산을 모두 팔거나 기증하고 어린 아이들과 함께 낮 설고 추운 만주 땅으로 가자는 남편의 말에 찬성을 하겠는가.

그러나 전여사는 남편의 말을 따랐다. 만주로 망명한 뒤 임편수 선생은 1910년대 중반, 만주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제2의 신흥무관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 후 1921년 2월 일제에 체포돼 수감됐으며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0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장남 임우상(1893~?)지사도 독립운동에 가담, 1919년 3·1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돌아가던 중 걸린 심각한 동상과 독감으로 20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21년 2월, 일제에 체포된 임면수 선생 (사진 아래쪽 우측 첫번째)

1921년 2월, 일제에 체포된 임면수 선생 (사진 아래쪽 우측 첫번째)


전현석 여사는 통화현에서 객주집을 하면서 독립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전기한 대로 이곳은 독립운동가들이 쉬어가고 정보를 교환하는 거점이었다. 전여사는 지친 독립운동가들에게 밥을 해주고 옷을 빨아 입혔다.

"(전략)...항상 웃는 얼굴로 병을 앓은 동지들에게 음식을 가려 위로해주는가 하면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군인들을 격려하며, 총탄에 상한 병자에게는 약을 다려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머지 않아 독립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였다...(중략)...수시로 들이닥치는 별동대, 특파대 사람들의 식사를 하루저녁 대여섯 번 씩 짓다보면...(중략)...군인들이 무기를 간수해주고 해진 옷을 기워주고 젖은 감발을 일일이 만져주는 이 거짓말 같은 수고와 고생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중략)...전현석(全賢錫) 여사의 인내력과 온순한 마음씨와 예절에는 누구나 머리를 숙였고 독립의 어머니로 정평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독립운동자로 선생 댁에 잠을 안잔 이가 별로 없고, 전현석 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어 실로 선생 댁은 독립운동가의 휴식처요, 무기 보관소요, 회의실이요, 참모실이며 보급처요, 정비실이요, 허구한 세월에 희생봉사 하시다가…(후략)"

1963년 허영백이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들의 중언을 엮은 '광복 선열 고 필동 임면수 선생 약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독립운동가의 휴식처요, 무기 보관소요, 회의실이요, 참모실이며 보급처요, 정비실'이었던 객주의 안주인으로서 '독립의 어머니'로서 누구나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전현석 여사는 남편 임면수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여 후인 1932년 세상을 떠났다. 저승에서나마 그동안 가슴에 묻었던 장남과 남편을 다시 만났을 것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집안의 중심엔 전현석 여사가 있었다.

현재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는 임면수 선생의 동상이 있다. 그 앞에 설 때마다 존경심이 절로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바라건대 그 옆에 전현석 여사와 아들 임우상 지사의 동상도 함께 세우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위대한 가족의 이야기가 널리, 오래도록 퍼지면 좋겠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공감칼럼, 언론인 김우영, 전현석,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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