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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수원에도‘시구문(屍柩門)’이 있었다
언론인 김우영
2020-06-01 16:00:28최종 업데이트 : 2020-06-01 16:00:19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수원에도'시구문(屍柩門)'이 있었다

[공감칼럼] 수원에도'시구문(屍柩門)'이 있었다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찍은 수원화성 남쪽 성곽. 멀리 팔달문과 남공심돈 사이에 남암문(시구문)이 보인다.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찍은 수원화성 남쪽 성곽. 멀리 팔달문과 남공심돈 사이에 남암문(시구문)이 보인다.   


수원 화성엔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 성지 북수동 성당, 시체를 내가던 시구문(屍軀門), 그리고 죄인을 참수하던 형장, 죄인을 가두었던 감옥이 있었다.  

수원은 정조대왕시대에 유수부(留守府)가 설치됐던 비중 있는 도시였다. 국력을 동원해 화성을 축성했고 성내에는 행차 때마다 임금이 묵어가는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화성행궁을 건축했다. 

또 지금의 서울을 지키는 수도경비사령부와 같은 성격의 군대인 장용외영(壯勇外營)이란 특수부대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군대는 행궁 내의 북군영, 남군영과 행궁 밖 종로 네거리 부근의 중영(현 후생내과 인근), 그리고 성 밖의 둔전(屯田:병사들이 농사를 지어 군량을 충당하는 논밭)을 경영하면서 수원에 주둔했다.   

무예24기란 우리 전통 무예는 장용영 무사들이 수련했던 무예다. 

화성 유수의 업무를 돕는 판관이 주재하던 이아(貳衙)란 관청도 있었으며 죄인을 가두었던 감옥도 있었다. 이아는 지금의 시청 행정업무과 법원 업무 등을 맡고 있었는데 위치는 신풍초등학교와 맞붙은 동북쪽, 현재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 자리다. 이곳에는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수원지방법원이 있었다

감옥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화성전도에 화성성내 팔달문과 남수문 중간쯤의 둥그런 건물로 그려져 있다. 

화성을 연구하는 단체인 (사)화성연구회가 화성성역의궤, 1911년도의 지적도, 1947년도의 항공사진, 현재의 지적도와 현장답사 등을 바탕으로 한 '화성 미복원시설 연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감옥은 현재 팔달문 가구거리에 있었다. 수원 토박이들은 지금도 이곳을 '옥(獄)거리'라고 부른다.

이곳은 죄인들을 잡아 가두었던 곳으로, 중죄인들은 이곳에서 수원천 남수문을 건너 동남각루 옆 언덕으로 끌고 와 목을 쳤다고 한다. 

섬뜩한 얘기지만 목이 떨어져 나간 시신은 성밖 언덕으로 굴려 버렸으며, 형을 집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수문 밖에서 기다리던 유가족이 목 없는 시신을 수습해 갔다고 전해진다.

죄인의 목은 시구문, 혹은 수구문, 시구문턱이라고 불렸던 남암문에 며칠이고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동남각루에 핀 억새꽃

동남각루에 핀 억새꽃

 
바람, 억새꽃, 동남각루
김우영

그 늦은 가을/남수문 지나 동남각루 가는 언덕길엔/바람 불 때마다 휘청 낭창 억새꽃들//유난히 모여 피어있네/밤 되면 넋인 듯 흰옷의 그림자/그 사이로 알 듯 알 듯 지나가네//자, 이 술 한잔 받으오//그 언덕에서 목 떨어진//천주학쟁이나 민란 적 칼회 사람이거나 살인강도거나/효수된 목 찾아가기 위해/애간장 다 녹아 서성대던 부모형제들이거나/그냥 길 가던 낙백 선비이거나/수해 때 무너져 내린 토사에 몸 묻힌 영혼이거나//거기 동남각루 아래 주막서 막걸리 한잔 할 때/어쩐지 추운 목숨처럼 바람 다가오거든/이 잔 드시고 가시우/억새꽃 위에라도 뿌려주시게    

남암문은 현재 팔달문 시장통 길 중간 쯤에 있었는데, 사형수 뿐 만 아니라 부정하게 죽거나 전염병 등으로 죽은 이들의 시체가 이곳을 통해 성밖으로 옮겨졌다. 

죽은 이들과 그 가족들의 한이 서린 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 번화한 시장통으로 이용되고 있음은 외로운 영혼들을 위해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겠다. 

현재 종로네거리 후생병원과 청과시장, 그 뒤쪽 북수동 성당 일부까지 아우르는 지역에 있었던 중영(中營)도 많은 이들의 목숨이 끊긴 곳이다. 

중영은 (사)화성연구회의 연구조사 결과 위치가 확인됐는데 일제시기 수원군청(해방 후 시 승격 뒤에는 화성군청)이 있었던 자리다. 구한말까지도 군대가 주둔했다고 해서 주민들은 지금도 병정촌(兵丁村)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수동 성당/사진 북수동성당 홈페이지

북수동 성당/사진 북수동성당 홈페이지

 
한편 천주교 수원교구는 지난 2000년 수원 북수동 성당을 순교성지로 선포했다. 
현재까지 순교지로 밝혀진 곳은 화성행궁, 이아, 중영, 동남각루, 형옥, 팔달문 밖 장터와 장안문 밖 장터이다. 종로 사거리,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 방화수류정, 화홍문 등도 순교지로 추정된다. 

수원화성 순교현장

수원화성 순교현장

수원성지에서는 박해 시대에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이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는데 수원 성지 순교자들의 시복 운동을 벌이고 있다.
 

'조선 문예부흥기의 군주'라고 불리는 정조대왕 재위 당시 천주교는 큰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 정조대왕은 천주교를 용납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묵인하다 시피한 것이다. 하지만 정조서거 후 두 번의 박해 때 수원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천주교박해가 시작되자 수원과 근교지방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이 이곳 수원화성으로 압송되어 고문, 처형 당했는데 교우들은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당당히 목숨을 바쳐 순교했다.

따라서 화성은 조선조의 역량을 총동원해 축성한 아름답고 실용적인 세계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고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버린 선조들의 정신이 살아있는 천주교 성지로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공감칼럼, 김우영, 시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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