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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서유구선생 선정비가 여기 있었네
김우영 언론인
2022-02-25 17:03:36최종 업데이트 : 2022-03-02 14:51:52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그저 나의 무지와 게으름을 탓할 수밖에 없다.

 

족히 수백차례는 수원화성박물관 앞을 지나다녔음에도 그 앞 정원의 선정비에 새겨진 서유구(徐有榘, 1764∼1845)라는 이름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와 '화영일록(華營日錄)'의 저자와 같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앞에는 거중기 모형이 있고 그 옆에는 중동 오거리 등지에서 옮겨온 조선시대 수원유수와 군수, 판관의 선정비들이 있다.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선정비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백성을 위협해 돈을 내게 하거나 자신의 재물을 들여 세운 '억지 송덕비'도 있다.

 

나는 화성박물관 앞 선정비 중에도 서유린이라는 유수의 선정비에 관심이 갔다. 선정비 하단에 큼직한 성혈(性穴, cup-mark)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혈은 '홈구멍' '알구멍', '알바위' 등으로도 불린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농사가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자식이나 남편이 출세하게 해달라며 돌에 구멍을 새긴 것이다.

 

아낙네들이 며칠 또는 몇 달 동안 밤새우며 단단한 돌에 돌을 비벼가며 만든 성혈은 성(聖)스럽다.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암반에 새겨져 있지만 수원에서는 장안문 안쪽과 화서문 안쪽에도 큼직한 성혈들이 보인다.

 

수원 백성들이 장안문과 화서문을 신성시했다는 증표다. 두 문을 통해 임금님들이 수원으로 들어왔기 때문일까?


서유린 선정비와 하단의 성혈(사진=김우영 필자)

서유린 선정비와 하단의 성혈(사진=김우영 필자)

 

그리고 여기, 화성박물관 앞 서유린 선정비에도 성혈이 있다. 그렇다면 서유린은 백성들에게 어질고 행정을 잘한 수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수원군읍지'의 '유수 선생안'에 채제공-이명식-조심태에 이어 수원유수로 임명됐다가 파면됐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파면된 관리를 위해 선정비를 세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신성한 장소에서 발견되는 성혈은 또 뭔가? 혹시 뒤에 명예회복이라도 된 것일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ㅇ박사, ㅎ관장, ㄱ교수... '사학(史學)한 이웃'님들 내 궁금증 좀 해결해줘.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임원경제지' 특집이 방송됐다. 이실직고한다. 나는 그 책이 조선시대의 식목(植木), 또는 조림(造林) 지침서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예상을 뛰어넘는 방대한 분량의 실용 백과사전이었다. 113권 53책이나 된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사전과 비교될 만 하다.

 

서유구 선생은 1806년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해 무려 30여 년 동안 집필하고 수정했다. 시골에 은거할 당시 "걱정 속에 있으면서 걱정을 잊기 위해 많은 자료를 모아서 '임원경제지'를 편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원경제지'에는 농업을 중심으로 복식, 천문, 건축, 음악, 미술, 식생활 등 다양한 학문이 수록됐다.

 

16지(志)로 구성돼 있는데 첫 번 째 '본리지'에는 전제(田制), 수리, 토양, 시비, 개간, 작물별 경작법 등 농사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관휴지'에는 산나물과 해초, 채소, 약초 등의 파종시기와 종류 등을, '예원지'는 화훼류의 재배시기, 재배법에 관해 다루고 있다.

 

'만학지'에는 과실류,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 등 각종 나무의 재배법 및 벌목법을, '전공지'에는 뽕나무 재배를 비롯한 옷감 제작 방법, 염색법 등 부녀자들의 길쌈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기상 예측방법, 가축의 사육과 질병 치료, 여러 가지 사냥법, 고기를 잡는 방법과 어구, 각종 음식과 조미료 및 술 등을 만드는 방법, 건축기술과 도량형, 각종 작업 도구도 소개하고 있다.

 

도가적인 양생(養生)을 위한 여러 가지 식이요법과 수련 방법, 의약 지식과 시골 사대부가 알아야 할 예법, 취향을 기르는 각종 기예, 선비들의 취미 생활 안내, 집을 짓기에 적당한 위치를 선정하는 방법, 심지어는 유통과 교역에 관한 내용까지 다루고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조선후기 시골사회의 경제사정과 농업정책, 농업기술, 민속 등의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한다.

 

서유구 선생은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북학파들과 어린 시절부터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특히 박지원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서유구 선생 선정비(사진=김우영 필자)

서유구 선생 선정비(사진=김우영 필자)

 

1836년 74세에 수원유수로 임명됐는데 이때 쓴 '화영일록'에는 수원에서 매일 기록한 업무가 수록돼 있다. 일기 형식으로 간략한 공무 일정을 기록하고 보고하거나 수령한 공문서, 수원유수부 산하 통치기구에 지시한 지령 등이 실려 있다. 특히 공문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재정 관련 기사이다. 아울러 화령전과 건릉, 그리고 현륭원에 관한 내용도 많아 당시대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누구보다 수원을 사랑하고 수원에 대해 조금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멀었다. 오늘도 또 하나 배웠다.

 

눈은 점점 침침해지는데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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