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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조병규도지사·양근웅...장안문 현판글씨 주인공은? (상)
김우영/시인, 언론인
2018-07-30 09:36:45최종 업데이트 : 2018-07-30 09:30:01 작성자 : 편집주간   강성기

타지에 나갔다가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 장안문을 보면 한동안 못 만났던 식구처럼 반갑다. '아, 이제 수원에 돌아 왔구나!'하고 안심이 된다. '수원 중독자' 중의 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장안문은 수원의 4대문 중 북문으로써 가장 크고 웅장하다. 국보 1호 서울 숭례문(남대문)보다 크다. 그러나 장안문은 6.25 때 유엔군 비행기 폭격을 받아 부서졌다. 처음엔 문루 반쪽만 날아갔으나 곧 나머지 부분도 무너져 내렸다.
 

내가 중학교 때 이곳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나도 같은 반 친구와 결투 장소를 이곳으로 잡아 주먹다짐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근데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친구는 얼마 후 다른 학교로 전학 갔다.
 

당시 내가 다니던 수원북중은 경기도내 수원인근 지방에서 제법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이 모였다. 당시 '화성군 봉담면 수영리'에 살던 나는 면소재지에 있는 '봉담국민학교'에 다녔다. 6학년은 두 개 반이었는데 이중 성적이 우수한 두 명만 수원북중학교에 원서를 내고 입학시험을 봤다. 결과는 두 명 모두 합격. 그 중의 한명이 나였다.
 

수원북중학교엔 낙제 제도가 있었다. 평균 60점을 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유급을 시켰다. 후배들과 동급생이 되어 공부하는 것이 부끄러워 대부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나와 결투를 했던 친구가 그만 낙제점수를 받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 만 것이다. 그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장안문을 지나칠 때 가끔 생각이 난다.

장안문 사진. 옹성과 성문, 그리고 장안문현판 글씨가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장안문 사진. 옹성과 성문, 그리고 장안문현판 글씨가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장안문을 볼 때마다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는 것이 장안문 현판이다. 멀리서보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글씨다. 글씨 한 글자 크기가 성인 키만 하다. 그런데 수원에서는 이 글씨를 누가 썼는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 조병규 경기도지사, 양근웅 서예가 등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글씨는 정조 때 문신으로써 호조참의, 지돈녕부사였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다. 그런데 장안문 복원 당시는 조윤형의 원본 글씨가 찍힌 유리건판 사진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당시 이병희 국회의원이 권유해 서열 2위의 권력자였던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중앙일보가 연재한 2015년 8월 14일자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광복 70주년 JP 특별회고'를 보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에는 장안문이 있는데, 화성을 복원할 당시 이병희 의원이 권유해 장안문(長安門) 현판을 내가 써서 걸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장안문 현판 글씨는 김종필 전총리가 썼다는 것이다. 이에 수원화성박물관 한동민 관장이 2017년말 김종필 전총리 측근을 통해 장안문 현판 글씨를 쓴 것이 맞느냐고 거듭된 확인했는데 김종필 전총리는 "그렇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낙천 (사)화성연구회 전 이사장이나 신응수 대목장은 장안문 현판 글씨는 김종필 총리의 글씨가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낙천 전 이사장은 당시 이 일을 담당했던 책임자다.
 

"그 당시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하지만 당시 도지사인 조병규지사의 글씨다. 비서실에서 문화공보실에 전달할 때 지사님 글씨라고 전달받아 대림산업 측에 내가 넘겨줬으니 낙관이 있든 없든 그 당시 도지사 글씨라고 해야 맞는다"고 증언한다.

 

장안문 현판 글씨에 대한 논란이 일자 한동민 화성박물관장은 이에 대한 글을 지역신문에 기고했다.

"...(전략)...결론적으로 말하면 장안문 현판 글씨는 김종필 씨가 쓴 게 아니다. 당시 경기도청 건축기사로 화성복원 실무 책임자였던 이낙천 전 화성연구회 이사장은 그때 일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 화성 복원을 담당하던 경기도청에선 장안문 현판 글씨를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의뢰하기로 하였다...(중략)...조병규 도지사를 수행하여 국무총리 결재를 받기로 한 바로 전날 종이와 먹물을 준비한 담당자였던 이낙천 선생은 마침 강화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아침 일찍 수원으로 출근하여 도지사와 함께 서울로 가기로 한 계획은 그 전날 밤 내린 폭설로 인해 제때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도청에서는 인계동 이낙천 선생 집으로 지필묵 등을 찾으러 갔으나 찾지 못한 채 도지사 일행은 서울로 출발했다. 강화도에서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돌아온 이낙천 선생은 준비물을 챙겨 서울로 출발하려 했으나 이미 도지사가 결재를 끝내고 총리 집무실을 나온 뒤였다...(중략)...일정이 급하게 된 장안문 현판 글씨는 김종필 국무총리 대신 조병규 경기도지사가 쓰기로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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