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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칼럼] 혈관이 막혔는데 우울증이 생긴다구요?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홍창형 교수
2021-07-21 16:21:49최종 업데이트 : 2021-07-21 16:21:10 작성자 :   e수원뉴스 윤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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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면 다 그래!

 

사람들은 노인이 되면 누구나 느려지고, 의기소침해지며, 무기력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80세가 넘어도 당당한 태도로 활기차게 인생을 즐기면서 취미 활동까지 하는 노인들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모습이 정상 노화 과정이 아닌 질병의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뇌영상을 통해 뇌혈관이나 뇌실질의 병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진단기술을 통해 젊은 사람은 드물지만 노인에게 흔하게 생기는 특별한 형태의 우울증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바로 혈관성 우울증이다. 국내 지역사회 노인 10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주요우울장애가 있을 때, 혈관성 우울증이 차지하는 비중이 65-69세는 33%였지만, 70-74세는 75%였고, 75세 이상은 100%나 되었다. 즉, 고령에서 생기는 주요우울장애는 뇌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혈관성 요인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뜻이다.

 

부연설명을 하면 노년기 우울증은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져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청년기 우울증과 다르다. 집안에 특별히 신경 쓰는 우환이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데 이유 없이 점차 자발성이 떨어지면서 만사가 귀찮아지고 말과 행동이 느려진다. 평소 매주 다니던 복지관도 안 나가고, 사람들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집안에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

 

그럼 왜 하필 혈관성 우울증은 노인들한테 잘 생길까?

바로 혈관 노화 때문이다. 자동차도 오래 타면 여기저기 고장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 몸의 혈관도 나이가 들면 딱딱하게 굳거나 막히게 된다. 몸도 기계도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 기계 부품이 녹슬고 고장 났을 때 교체하면 되지만 혈관은 부품 교환이 안되니 평생 동안 관리를 잘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럼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 만일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이 있다면 약물치료를 통해 정상 혈압, 혈당, 혈중 콜레스테롤을 유지해야 한다. 만일 비만, 흡연, 운동부족이라면 하루 빨리 생활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정기검진을 통해 정비가 잘 된 자동차가 큰 고장이 나지 않는 것처럼 정기 신체검진을 통해 혈압, 당뇨, 고지혈증 수치를 매년 확인해야 한다. 혈관에 나쁜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은 나중에 혈관성 우울증과 혈관성 치매로 고생하게 된다.

 

혈관성 우울증 환자의 뇌영상 사진을 보면 유독 특정 부위에 뇌혈관이 많이 망가져서 하얗게 변해버린 모습이 발견된다. 피질-선조체-시상-피질 회로의 손상으로 인해 전두엽 기능과 연결되는 뇌신경회로가 고장난다. 전두엽이 고장 나면 매사에 의욕이 없고 자발성이 떨어지며 말과 행동이 느려지는 증상이 생긴다.

 

'난 젊을 때 우울증이 없었고, 가족 중에서도 우울증이 없었는데 왜 나이 들어서 우울증이 생겼지? 자식 농사 잘 지어서 하나도 신경 써야 하는 데가 없는데 말이야.' 의아해 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MRI 사진을 보여주고 설명하면 그제서야 당장 담배를 끊고, 매주 등산을 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혈관성 우울증이 무서운 이유는 혈관성 우울증이 혈관성 치매의 전조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80년대 MRI를 비롯한 뇌영상 진단기술이 발달하면서 크리슈난(Krishnan) 박사가 노인들에게 생기는 우울증은 유난히 뇌혈관이 막혀서 뇌백질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이 많다는 것을 보고했다. 크리슈난 박사는 50세 이후에 뇌혈관질환의 뇌영상적 근거, 기억 및 정보처리속도의 저하, 흥미나 즐거움의 상실이 있을 때 혈관성 우울증이라고 명명했다. 일본의 후지가와(Fujikawa) 박사도 비슷한 현상을 보고했고, 이후 혈관성 우울증에 대한 개념이 만들어지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사실 이렇게 혈관이 막혀서 우울증이 생긴다는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70년대까지 보고된 뇌졸중 환자 자료에 의하면 뇌졸중을 경험한 환자의 40-50%는 크고 작은 우울증을 반드시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뇌졸중 후에 생기는 우울증은 보통 큰 소낙비에 옷이 홀딱 젖듯이 한꺼번에 증상이 갑자기 생긴다면, 피질하 허혈성 혈관성 우울증은 미세혈관이 천천히 막혀서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증상이 서서히 나타난다. 경과가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보통 정상 노화 과정으로 오해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흥미로운 사실은 뇌혈관이 막히는 부위가 아무리 넓어도 우울증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비록 부위가 작아도 특정 뇌영역을 침범하면 우울증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 뇌 속에 우울증을 유발하는 특정 영역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망이 생긴다'는 통념이 있었다. 그런데 의학이 발달하면서 노망은 일반인보다 치매에 걸린 사람에서 많이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정상적인 노화 과정을 경험하는 사람은 사망 직전까지 노망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노화 과정을 경험하는 사람은 사망 직전까지 우울증, 무기력감을 보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이유는 <혈관성 우울증>이란 질병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아직도 일반인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뇌질환보다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울증 치료에 장애가 되어 노년을 활기차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데 무기력하고 무덤덤하게 보내는 사람이 많다.

 

중요한 사실은 노년기에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우울증이 없는 사람보다 치매의 위험이 2배 높아진다는 점이다. 혈관성 우울증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금연, 운동, 체중조절을 통해 예방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및 항우울제 복용으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혈관성 우울증을 잘 치료하면 삶의 질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렇게 아버님이 밝고 활기차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나이 들면 모두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웃음 짓던 보호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건강하고 활기차게 노년을 즐기는 노인을 바라보면 세월을 이기는 지혜는 있는 것 같다.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홍창형 교수 프로필 및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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