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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광교산 창성사지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
언론인 김우영
2019-01-18 17:03:06최종 업데이트 : 2019-01-18 16:58:22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광교산 창성사지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

[공감칼럼] 광교산 창성사지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


2016년 창성사지 발굴 모습. 사진/수원화성박물관

2016년 창성사지 발굴 모습.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자칭 타칭 '광교산 산신령'인 내가 최근 광교산에 자주 가지 못했다. 지독한 미세먼지 때문이었다. 지난 여름엔 40도에 육박하는 더위 때문에 산행이 뜸했다. 실크로드 여행 때 섭씨 60도에 달하는 극강의 폭염 속에서 사막을 걷고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앞에도 서봤다. 그런데 그 곳은 그늘에만 들어서면 그런대로 살만 했다.

지난 여름엔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코스 답사를 다녀왔다. 박지원이 중국으로 가는 사절단을 따라 가면서 보고 들은 바와 본인의 생각을 쓴 '열하일기'는 보석과 같은 기록이다. (사)화성연구회는 여름 해외답사를 박지원이 다녀왔던 코스로 잡았다.

한국은 태풍과 비가 와서 그리 덥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땡볕 속에서 만리장성 고북구장성(古北口長城) 구간을 오르고,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별장인 승덕 피서산장 곳곳을 땀투성이가 된 채 걸어서 강행군했다. 북경에서는 인파에 밀려 둥둥 떠다니며 '다시는 안 오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국 역시 그늘에 들면 그런대로 시원했다.
중국 고북구장성. 사진/김우영

중국 고북구장성. 사진/김우영

하지만 우리나라 지난 여름 폭염은 그늘도 소용없었다. 창문을 모두 열고 반바지만 입은 채 선풍기를 밤새 틀어도 땀은 줄줄줄 흘러 내렸다. 잠을 못 이루어 아침마다 눈이 벌겋게 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몇 번은 광교산행을 시도했다. 내 작업실이 있는 행궁동 종로 사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광교산 13번 버스 종점까지 갔다가 자전거를 거기 두고 마음 내키는 코스를 잡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 내 최근의 산행 방식이다. '철인 2종 종목'이라고 스스로 이름 지었다.

겨울은 오히려 산행에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 미세먼지가 덜한 날 모처럼 광교산행을 했다. 평소처럼 13번 시내버스 종점 구석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어느 코스를 택할까 생각하다가 창성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다.

나는 이 길을 좋아한다. 고려 말 진각국사가 주석하다가 입적한 창성사 절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 한때 신문사에서 해직을 당한 적이 있었다. 문화체육부장 시절이었는데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1991년인가 중국과 수교되기 전 약 보름동안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의 생활상을 취재하러 간 사이 사측에서 해직을 결정한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취중상태에서 몇 주를 보냈다. 그러다가 '백수들의 안식처'인 광교산으로 향했다.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은 회사 출근 복장의 중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때 절터로 추정되는 공터 나무 밑에 앉아있는데 나뭇잎이 하나 툭 냇물 위로 떨어지고 아무일도 아닌 듯이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나뭇잎을 보았다.

아래로 흘러내리지만,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물. 그때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작은 깨달음을 얻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이후 자주 찾게 된 곳이 창성사지다.

고려시대엔 창성사 말고도 서봉사, 미약사(또는 미학사) 등 89개의 절집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절터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 수원 쪽의 창성사와 용인 쪽의 서봉사인데 두 곳 모두 고려시대에 진각국사와 현오국사가 각각 주석했던 명망 높은 절집이다.

창성사지는 상광교동 산41번지, 고도 344m로 광교산 중턱에 있다. 13번 버스 종점 등산로 안내소에서 폭포식당 앞 개울을 건너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절터 축대와 만난다. 창성사지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축대와 건물기단, 주춧돌, 우물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기와 조각이 숱하게 발견되고 있다, 진각국사비가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일제시대의 비석도 남아 있다. 이곳에 있다가 행궁동(매향동 방화수류정 입구)으로 이전한 창성사 진각국사비는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가 창성사지를 자주 찾는 이유는 진각국사가 머물렀다는 역사적 사실도 작용하지만 이 절터에서 바라보는 하계(下界)의 풍경이 매우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화엄세계(華嚴世界)! 왜 진각국사가 이곳에서 주석했고 여기를 입적처로 삼았는지 알 것 같다.

지난 2015년 창성사 발굴조사가 한참이던 때 가을 이곳을 방문했다가 시 한편을 얻기도 했다.

'발굴단이 조심조심 파헤쳐 간/ 흙 속에는 돌멩이들 속에는/ 기와 조각도/ 깨진 사기그릇도/ 잠자러 들어간 애벌레들도 있지만// 잠에서 아우웅 기지개 하며 깨어난/ 천 년 전의 바람과/ 그때 그 가을 햇살도 보였다// 푸스스 머리칼 털며 고개 든/ 생각도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므로 내가 눈을 떴다/ 감았다/ 다시 천 년 전의 가을이었다' -졸시 '출토, 창성사지'

아쉬운 점은 창성사 진각국사비가 제자리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창성사 진각국사비를 제자리로 돌려주는 것이 좋겠지만 혹시 관리상의 문제가 우려된다면 복제품이라도 만들어 원래 자리에 세워두었으면 좋겠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공감칼럼, 김우영, 창성사지, 광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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