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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늙고 젊음이 없다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7-02-27 11:15:07최종 업데이트 : 2017-02-27 11:15:0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여든 한 살의 일본인 조각가 세키 간테이가 쓴 '불량노인이 되자'를 읽고, 내심 이 정도 삶이면 살아갈 만하지 않나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살아가기 위한 절실함에는 늙고 젊음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물며 내 자신이 이미 입문 수준이라고 감히 말하는 주위 사람도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불량노인은 '시들지 않는 삶'이다. 즉 단 한번뿐인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나이를 잊고 항상 의욕적으로 '불량하게 사는 것'이다. 

예순이 갓 넘은 중년이 찾아와 인생에 후회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부모님 반대로 정원사의 꿈을 버리고 월급쟁이가 된 것, 또 여자를 유혹해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자 간테이 선생은 기가 막힌다는 태도로 답변을 준다. '지금 그걸 하면 되잖은가'. 

간테이씨의 '불량'은 '번득이는 생명력'이다. '이 나이에 무슨…' 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 있게 하라고 말한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선망이 아닐 수 없다. 여든 살이 예순 살보다 인생을 덜 즐겨야 된다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다. 

어느 여성 작가는 젊은이들에게, 사랑 받는 어른이 되려면 누구나 조금씩 귀여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경계심이라는 '마음의 갑옷'을 벗겨 '귀여워' 소리를 듣자. 생명은 늙으나 젊으나 똑같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삶. '위그든' 노인처럼 박하사탕 향내 나는  삶. 이 정도 삶이면 세상 살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하여 사랑 받는 어른이 되자. 

미장원에 들어서면 미장원 아주머니는 막무가내로 내 머리부터 감긴다. 방금 머리를 감고 왔다고 해도 들은 척도 안한다. 그런 다음에 머리를 깎는다. 오십 줄은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머리 깎을 때는 누구나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웃는다. 능숙하게 깎는 모습이, 이십 대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여자 손님들은 혼자 온 백두옹을 놓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데 뭐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우스갯소리 몇 마디하면 젊은이(?)들은 마냥 즐거워한다. 결국은 "흰 머리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나이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이답게 처신한다는 것은 제한이 많아진다는 의미이다. 제한된 삶은 인생이 쓸쓸하다. 나이 들면 몸은 자연스레 죽음과 가까워진다. 어린 시절. 마음도 시들어 점차 죽음에 가까워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마음가짐은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한갓 테니스코트 중앙의 네트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같이 놀던 국민학교 세 절친은 벌써 네트 저쪽으로 넘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저쪽이 좋은 가 보다. 

나이 들어도 시들지 않는 삶. 규범에 충실하기보다는 흔들리는 것 또한 매력이 있다고 한다. 고려청자의 꽃잎문양 하나가 삐뚠 것이 파격이고 더 매력적이라는 것처럼. 때로는 싱거운 소리를 이리저리 지껄이고 욕지거리도 스스럼없이 중얼댄다. 별 볼일 없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랍시고 심각하게 해댄다. 가끔 술잔에 남아있는 술 높이를 비교하고 그 높이에 의미를 부여한다. 가판대 신문을 사서는 훌쩍 길바닥에 앉아 기사를 훑기도 한다. 객쩍은 이야기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치졸함은 투박하지만 어쩌면 청초할 수 있다. 

삶은 늙고 젊음이 없다_1
삶은 늙고 젊음이 없다_1

지금도 가끔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졸랑대며 뛰놀던 시절. '저 녀석이 언제 커서...' 라는 부모님의 조바심이 한몫 했던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도 별난 호기심이 오그라들지 않기 때문일까? 새삼 현관 한 구석에 놓인 줄박각시나방 번데기가 언제 다시 깨어날지 궁금하다. 하루하루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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