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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해마다 오고 또 간다
윤수천/동화작가
2017-06-23 11:27:32최종 업데이트 : 2017-06-23 11:27:3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상처는 아물되 가끔 덧내야 한다.'고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오래 전, 어느 해 6월의 한 지면(紙面)에서였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버리면 사람들은 그 상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 뜨겁던 1950년의 6월을 상기시켰다. 

1950년 6월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다. 이 땅의 7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했던 뼈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다.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올라야했던 그 기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낯선 집 처마 밑을 빌려 잠을 청했던 날, 밤하늘의 별들은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나는 지금도 종종 꿈에서 그 푸른 별들과 만난다.

박완서 작가는 6월의 상처를 가끔 덧내야 한다면서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하였다. 어떤 빚이냐 하면, '강强한 나라'·'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이 뭔지도 모른 채 '전쟁'이라는 화마 속에서 타의에 의해 죽어간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강한 나라,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 짐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고 있다 하였다.

6월이 올 때마다 짙어가는 녹음과 함께 되살아나는 저 아득한 날들의 추억들! 3년의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는 참으로 처참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눈에 비친 나라는 한마디로 '거지 나라'였다. 어느 날엔 불에 탄 흙더미 위에 앉아 검게 탄 쌀을 씹어야 했고, 또 어느 날엔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청해야만 했다. 학교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우리는 잿더미로 변한 학교를 망연히 바라보며 운동장이나 냇가에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앉은뱅이책상을 하나씩 둘러메고 다니다가 아무 데나 놓고 앉으면 그 곳이 곧 교실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군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껌이나 초콜릿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헬로!"와 "기브미 껌!"은 내가 처음 배워 사용한 영어였고 국제화 시대를 연 조기교육의 일환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때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잘 살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지금처럼 아파트가 즐비하고 거리마다 번들거리는 자동차가 줄을 이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 황홀한 꿈은 저 태평양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나 누릴 수 있는 권리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나라에서 보란 듯이 늙어가고 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6월이 오면 나도 모르게 박완서 작가를 떠올리게 된다. 산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 왜 이리도 가슴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수원시 현충탑 참배
수원시 현충탑 참배


'조국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고/우리가 있는 곳에 충성이 있다/
 청춘의 끓는 피 불태우며/충성을 맹세한 나의 전우야/
 조국의 산하를 누가 지키랴/너와 내가 아니면/
 조국이 있는 곳에 겨레가 있고/겨레가 있는 곳에 영광이 있다'

오래 전 문화예술인들 틈에 끼어 전방을 돌아보고 와서 그날 밤에 쓴 '조국이 있다'란 노래가사다. 이 가사는 건전가요의 대부 전석환 선생이 곡을 부쳐 지금도 군에서 부르는 군가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정진우 감독이 만든 '아벤고 공수군단'이란 영화에 배경음악으로도 들어갔던 군가다.

개인도 강해야하지만 나라는 더욱 강해야 한다. 국력이 모자라 당해야 했던 쓰라린 역사의 설움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6월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의미 깊은 달이다. 가슴에 새기고 새겨야 할 비석(碑石) 같은 달이다.
아, 6월이다. 저 초록의 산들을 바라보자! 푸르디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윤수천 동화작가, 6월, 호국보훈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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