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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안주는 푸짐했다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6-12-25 11:08:34최종 업데이트 : 2016-12-25 11:08:3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연구개발 사업은 통상 1년 동안의 연구결과를 분석, 정리하여 연말에 이를 발표하도록 되어있다. 연말 발표가 끝나 실용적 내용이거나 새로운 결과로 인정되면 이어서 관련 학회에 보고한다.

예정된 발표일이 다가오면 연구원들은 연일 밤늦게까지 자료정리 하느라 정신이 없다. 지금은 모든 자료 분석, 정리, 발표를 컴퓨터에 의존하지만 지난 70년대만 하더라도 가감승제 계산은 주로 주판 또는 수동식 타이거계산기(기계식계산기로 1960년대 말까지 보급)를 이용하고 통계분석은 수(手)계산 하였다. 

그 후 확보된, 한일청구권자금으로 들어온 탁상용 일제 샤프계산기는 연산(演算) 가능하여 간단한 통계분석에 활용되었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은 당사자가 직접 만들어야 했다. 간혹 고급 통계분석은 중앙기관의 천공식 EDPS(Electronic Data Processing System)를 이용하였다. 

발표는 전지(全紙) 갱지를 이용한 괘도발표였다. 이때 나무 지시봉을 이용 괘도걸이의 발표 자료를 다음 장으로 넘기는 것도 능숙한 손기술이 필요했다. 다소 진보된 상태에서, 괘도발표는 스크린을 이용한 OHP(OverHead Projector) 또는 슬라이드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날 안주는 푸짐했다_1
그날 안주는 푸짐했다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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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안주는 푸짐했다_2
타이거 계산기

전지 갱지를 이용한 발표 내용은 연구원이 흑색 색연필 또는 매직펜을 이용, 차트 글씨로 작성한다. 이때 글씨 깨나 쓰는 직원은 이리 불리고 저리 불리고 마냥 주가가 올라간다. 발표 자료 괘도는 둘둘 말아 광목 주머니에 넣고 어깨에 메고 다닌다. 오늘 날 사무용통이나 그림통이다.

그날 이 아무개 연구원은 발표 자료를 정리하느라 밤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마침 그림 한 장을 복사하여야 할 일이 생겼다. 당시 유일한 흑백복사기는 고장이 잦고 복사지는 설계도 청사진 뜨는 용지였고 복사 역시 허접스러웠다. 하지만 이 아무개 연구원은 문제없다는 듯 원본 그림과 복사할 종이를 겹쳐들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대고 원본에 맞추어 연필로 그림을 떠올 태세였다. "어? 안 그려지네."  

드디어 발표하는 날. 관련대학교수 등 평가위원을 초청하고 관련 연구원들이 모인 오늘. 처음 마련한 OHP기기를 이용하여 발표회를 갖기로 했다. 한 장 한 장 일일이 발표 자료를 지시봉으로 직접 넘겨야 하는 괘도 발표와는 달리 스크린에 비친 내용의 발표가 끝나면 OHP를 조작하고 있는 직원에 사인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발표 전날 예행연습도 했다.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투수와 포수 사인이 절묘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화를 이루면서 발표가 진행되었다. 이 같은 모습은 세월이 지나면서 발표자가 직접 OHP, 나아가 프레젠테이션을 조작하고 나무 지시봉은 레이저 포인터가 대신 했다.

다음은 이 아무개 연구원 발표순서다. 그런데 발표도중 한 평가위원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우물우물 답변을 하면서도 그런대로 한 장의 발표가 끝났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순서다. 허나 이 아무개 연구원은 답변 내용이 마음에 걸렸던지 다소 당황하는 모습이다.  

긴장한 이 아무개 연구원은 OHP를 조작하는 직원에게 사인을 보내지 않는다. 포수가 사인을 안 보내니 투수는 어느 공을 던져야 할지 망설이고, 관중석은 술렁이고, 동료 연구원은 빨리 OHP를 넘기라고 연방 눈짓을 한다. 그렇지만 OHP 직원은 꿈쩍도 없다. '포수가 사인을 안 보내는데 어떻게 공을 던져?' 

관중석의 눈들이 모두 포수의 동작에 집중한다. 한편 당황한 이 아무개 연구원은 지시봉으로 몇 번이나 스크린을 긁어대도 왜 발표 자료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나? 나름대로 진땀을 흘린다. 드디어 이 아무개 연구원은 큰 결심을 한다. '지금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침을 바른다. 그리고 스크린을 비벼대며 발표 면을 넘기려 한다. 

모든 발표 일정이 끝난, 그날 저녁 회식자리 안주는 유독 푸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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