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지고 있는 책을 한 권 한 권 정리하다보니 시집들이 몇 권 눈에 띈다. '사랑이 가기 전에'(조병화 1957), '소녀의 노래'(장만영 편 1958), '사슴의 노래'(노천명 1958.6.15), '소녀의 기도'(이설주 편 1961) 등으로 뒷장에는 어김없이 누님의 여고시절 펜글씨 서명이 있다. 여학생들은 사랑, 소녀 등 단어에 가슴 설레느라 한번쯤 문학소녀로서의 꿈을 갖는가 보다. '사슴의 노래'를 뒤척이며 _1 '사슴의 노래'를 뒤척이며 _2 노천명은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재학하면서 '밤의 찬미', '단상',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고 졸업 후 기자생활을 한다. 그리고 시집 산호림(1938),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3)를 출간한다. 첫 시집에 수록된 '사슴'에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은 물속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예전에 누렸을 아름다운 생활을 생각해 낸다. 작가는 그때마다 떠오르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 먼 산을 바라본다. 긴 목은 그럴수록 더욱 가냘프고 슬프다. 작가의 운명적인 모순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기야 황해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 말년에 양녀를 데려다 생활하였다 한다. '사슴의 노래' 원고를 정리한 조카 최용정은 '이 책을 내면서'에서 아주머니는 운명을 두려워하였고 짧았던 인생은 후반에 더욱 처참하고 불행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고적(孤寂)은 오히려 본연의 자기에 서게 하였고 마음의 평정, 생의 참된 복을 가지게 하였다고 회상한다. '내가 걸어가는게 아니오 밀려가오' '말도 안 나오고 눈 감아버리고 싶은 날이 있소'. '할머니 내게 레몬을 좀 주시지, 없음 향취있는 아무거고 곧 질식하게 생겼오!' '사슴의 노래' 말미에 있는 '나에게 레몬을'이다. 그는 진즉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최용정이 찾아낸 원고 뭉치에는 마침 서명(書名)과 목차가 꾸며져 있어 유고시집 '사슴의 노래'를 출간하는데 편집의 수고는 덜었다고 한다. 시집에 실린 '나에게 레몬을'은 작고 하루 전 세계일보 문예란에 실렸다고 한다. 고인의 애절한 유언인 셈이다. 모윤숙은 서문에 '날 때부터 외로운 여자, 살면서 인생을 자기 언덕에서 눈물에 혼을 적시면서 혼자서 적막하게 인생을 걸어간, 그리고 그만 그를 놓쳐 버렸다'고 술회한다. 그는 자신을 사슴에 비겨 사슴처럼 살아왔다고 한다. 학창시절 조종현, 윤오영, 손동인 그리고 김계곤, 김우종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에게서 배움을 받았지만 시문학보다는 이마동, 유영필 등 미술교사의 행보에 더 관심이 쏠렸다. 시는 조계종 스님들의 법어와도 같은 맥락인가 생각하기도 하고 어쩌면 신들린 무당의 외침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진즉 관심을 갖고 빠졌어도...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이제야 누님을 통해 뒤척인다. 이참에 누님한테 전화라도 하여야겠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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