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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수원 화성을 조선농업의 전초기지로 삼다
최형국/역사학박사, 수원시립공연단(무예24기) 상임연출
2015-12-12 09:45:59최종 업데이트 : 2015-12-12 09:45:5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고 만든 대표적인 저수지인 만석거와 둔전은 정조의 농업정책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서둔동(서쪽의 둔전)이라는 이름에서 살필 수 있듯이 수원은 정조대 대표적인 농업 부흥 도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시작은 쉽지만은 않았다. 수원지역은 원래 소금기가 많아 척박한 곳으로 정평이 나있었고, 수로 시설이 정비되지 않아서 해마다 가뭄이면 농사의 절반이 말라 죽어버렸던 곳이었다. 

그곳에 정조는 농업개혁의 씨앗을 뿌렸다. 먼저 정조는 지금은 수원천으로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버드내(柳川)라는 화성을 관통하는 하천에 대하여 대대적이 준설작업과 함께 제방공사를 단행하여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화성 안팎의 용연과 남지, 북지, 동지 등 여러 곳에 연못을 만들어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게 하였다. 

이렇게 작은 치수사업들을 전개하면서 수원 화성을 방어하는 부대인 장용외영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하여 병농일치 형태를 과감하게 진행시켰다. 바로 평시에는 농사를 짓다가도 유사시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자급자족형 군사들을 화성에서 키워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만석거라는 거대한 인공저수지였다. 지금도 만석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조는 화성의 북쪽 성곽 밖에 둔전을 개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 안정적인 물공급을 위하여 둘레 1천22보 규모의 거대한 저수지인 만석거가 1795년 5월 18일에 완공되었고, 이때부터 둔전은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 둔전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장용외영의 장교, 서리와 군졸들이 가장 첫 번째 대상자들이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경작지가 없는 수원부민들에게 균등하게 분할하였다. 

정조, 수원 화성을 조선농업의 전초기지로 삼다_1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영화정도(迎華亭圖)의 모습: 영화정은 만석거 남쪽에 약간 높은 곳에 세운 정자로 인근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림을 보면 만석거 물위에 떠있는 배와 주변의 버드나무, 소나무의 풍경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영화정이 보이며, '만석거(萬石渠)', '여의교(如意嬌)' 라 새긴 표석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영화정은 1996년에 원래의 자리에서 동쪽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는데 송죽초등학교와 만석거 사이에 있다.

당시 만석거에는 수구(水口)와 수갑(水閘)을 여러 곳에 설치하여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도록 설계하였고, 회전식 수차(水車)를 배치하여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는 수원에서 농사짓는 땅들이 대부분 시냇물의 높이 보다 높아서 쉽게 물을 가둘 수 없었기에 당시에는 최첨단의 농업시설들이 있어야만 안정적인 생산량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만석거와 둔전에 들어갈 각종 농업기계들을 장용영에서 직접 설계와 제작까지 마쳐 현장에 투입시켰다. 이러한 농업개혁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수원만큼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또한 장용영 군사들이 비록 힘은 좋지만, 농업에 대한 현장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기에 경험 많은 농부들을 각각 한명씩 군사들에게 붙여줘 혹시 모를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화성의 북쪽은 만석거를 통해 둔전경영이 안정화가 되자, 바로 이어 1798년(정조22) 6월에 드디어 화성의 서쪽에 새로운 둔전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서호(축만제)와 서둔(축만제둔)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화성부 서쪽 5리에 있는 여기산 아래에 전체 길이 1천246척, 너비 720척, 몽리답 232석락의 당대 최대규모의 저수지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지만, 만석거나 서호(축만제)에는 그때 흘린 땀방울들이 가득 모인 곳이기도 하다. 조선 농업 개혁의 출발이 바로 수원 화성과 함께 펼쳐진 것이다. 

수원은 그렇게 정조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만들어진 도시이기도 하다. 소금기 많은 척박한 땅을 옥토로 일구기 위해 펼친 농업개혁 정책은 지금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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