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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년(乙卯年), 정조의 수원 능행차 뒷이야기
최형국/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 시범단 상임연출, 역사학박사
2016-07-01 15:25:03최종 업데이트 : 2016-07-01 15:25:0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을묘년(1795년), 정조가 자신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여 진행한 을묘원행은 정조 자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의미있는 행사였다. 특히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세상을 떠난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 역시 혜경궁 홍씨와 동갑이었기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수원 화성에서 펼치고자 준비했던 효(孝)의 행차이기도 했다. 

정조는 능행과 관련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더했다. 당시 행차 비용은 10만냥 정도가 예상되었는데, 이 돈은 기존에 화성의 상인들에게 빌려준 진휼청의 돈 6만 5천냥과 4년간의 이자 2만 6천냥을 더하고, 환곡으로 사용했던 쌀과 어세전(漁稅錢)을 비롯한 왕실 특수 세금 등을 모아 충당하였다. 또한 부족한 재정은 왕실의 금고격인 내탕금(內帑金)을 털어 넉넉한 경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8일간의 수원 화성 행차 과정 중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숟가락 하나, 반찬값 하나까지 기록하여 투명한 재정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모든 내용들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소상히 담겨있다. 이런 엄청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정조의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차곡차곡 행차를 준비하던 때에 제주에서 급보가 올라왔다. 그 전해인 1794년에 전국적으로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는데, 제주도의 경우는 굶어 죽는 사람까지 발생하면서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상소였다. 을묘년 2월에 제주에서 올라온 상소문을 받은 정조는 비록 능행차를 위하여 준비한 돈이지만, 먼저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1만냥을 모두 곡식으로 바꿔 제주도 배를 통해 옮기도록 하였다. 

또 10만냥 중 1만냥은 마치 종자돈을 만들 듯이 장기적인 포석으로 화성에 설치한 둔전을 안정화시키는 곳에 사용하였다. 만석거(萬石渠)를 비롯한 수리시설을 보수하고 수차를 비롯한 농업용 도구제작에 그 돈을 쏟아 부었다. 이를 통해 화성과 행궁 유지의 안정적인 재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정조는 행차를 마치고 난 뒤 남은 돈을 모두 모으게 하여 전국의 백성들에게 배고픔을 덜어 주도록 '을묘정리곡(乙卯整理穀)'이라는 이름으로 진휼미를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특히 화성의 백성들에게는 이자가 '0'인 형태로 분급해서 수원 화성의 경제권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을묘년(乙卯年), 정조의 수원 능행차 뒷이야기_1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실린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이다. 을묘년 능행차때 정조가 직접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하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이처럼 을묘년의 수원 화성 능행은 왕실이 주도하고 국왕이 진두지휘한 국가 최고의 행사였지만, 백성의 살림살이를 먼저 살핀 위민(爲民)의 통치철학이 실천된 행사이기도 했다. 요즘도 적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백억 규모의 국책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진다. 특히 9월과 10월의 대한민국은 마치 '축제 공화국'인양 전국 어디를 가도 흥겨운 축제가 매주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런 축제의 비용 역시 모두 국민들의 세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오로지 축제에 모든 비용을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그 중 일부를 공식적으로 시민을 위한 기금이나 헐벗고 굶주린 약자를 위한 종자돈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축제(祝祭)'는 단순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공간이 아니라, 그 이름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무엇인가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성스러운 시공간이기도 하다. 정조가 을묘년에 보여줬던 그 위민의 정신은 시대가 흘러도 결코 변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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