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도 정조에게 불만이 있었다
최형국/문학박사,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시범단 수석단원
2014-09-21 11:40:42최종 업데이트 : 2014-09-21 11:40:4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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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가장 의미있는 인연을 들자면 단연코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일 것이다. 정조가 꿈꾼 개혁정치의 밑그림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신하가 바로 정약용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들의 관계를 구름과 용이 만나고, 바람과 범이 만나듯이 밝은 임금과 어진 재상(宰相)의 인연이 맺어지는 '풍운지회(風雲之會)'라 말하기도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군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유적지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있다. 자신을 그리 사랑하던 군주를 먼저 떠나보내고, 유배길에 올라 수 많은 생각을 책에 담았다. 다산에게 유배는 자신을 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정조는 조선후기 개혁군주라는 평가도 많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상대방을 가르치려 들었기에 많은 한계가 드러난 군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신하들이 정책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여 활발한 토론과 창의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뤄낼 수 없었다. 매사 불여튼튼이라고 꼼꼼하게 정책과 백성을 살피는 것도 좋지만, 군주는 신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여야만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지도자가 지나치게 꼼꼼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피곤해진다. 일정 정도의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펼쳐줘야 그들도 숨을 쉴 수가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아랫사람들의 말만 믿고 모든 일을 처리한다면 그것은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똑똑한 지도자라도 남의 머리를 달고 조직을 운영한다면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괴물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길이 어렵고도 험한 것이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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