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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의기(義妓) 김향화를 추억함
최정용/시인·언론인
2015-03-09 09:28:43최종 업데이트 : 2015-03-09 09:28:4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때는 기미년(1919년)이었고 그 해 3월 한반도 전역에는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수원에는 29일 불이 붙었다. 수원지역 만세운동의 핵심에는 자혜의원 앞에서 봇물처럼 터진 기생들이 있었다. 꽃다운 스물셋의 김향화가 선두에 섰다. 

선봉에선 김향화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운동을 이끌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2개월여 동안 감금과 고문을 당했고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는다. 보안법 위반 8개월 구형 최종 징역 6개월을 언도. 이 재판에는 많은 방청객들이 참석했다. 기생에 대한 재판이라는 점이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수원지역의 수많은 기생들이 참석해 홀로 핀 꽃, 김향화의 의로움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3월, 의기(義妓) 김향화를 추억함_1
3월, 의기(義妓) 김향화를 추억함_1

▲ 젊은 의화(義花) 33송이

당시 일제의 보고와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는 그 날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만세운동을 벌인 사람들이 김향화·서도홍·이금희·손산홍 등 수원예기조합 33명의 기생이라고 기록한다. 역사의 현장인 자혜의원은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과 함께 시작된 행궁의 파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제는 정조로 상징되는 화성행궁을 무너뜨리며 식민지 행정기구와 병원을 설치, 식민지의 시혜(施惠)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꼼수를 부렸다. 

이를 위해 1910년 화령전(華寧殿)에 자혜의원을 설치하 것. 화령전은 정조의 사당이었지만 1908년 9월 20일 정조의 위패와 어진이 덕수궁으로 옮겨지면서 빈 상태였다. 이후 자혜의원은 화성행궁의 정궁인 봉수당(奉壽堂)으로 옮겨졌고 다시 1923년 자혜의원을 경기도립 수원의원으로 명칭을 변경, 봉수당을 허물고 근대식 병원건물로 지었다. 이는 조선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일제의 비열한 수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일제의 심장에 꽂은 태극물결

이런 일제의 음모를 잘 알고 있던 기생들이 일제의 상징인 자혜의원 앞에서 거사(擧事)를 도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은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로 재편되기 전까지 관기(官妓)들이었다. 이는 기생들에게 화성행궁은 고향과도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대왕 이후 수원은 화성유수부로 불렸다. 도시가 확장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기들이  활동했던 곳이 화성행궁이다. 이곳에 일제가 병원과 경찰서, 식민통치기구인 군청을 세워   자신들의 통치를 과시했으니 수원기생들에게는 더욱 치욕적일 수 밖에 없었다. 또 일제가 공창(公娼)제도를 확장하면서 제일 먼저 실시한 것이 기생들에 대한 정기적인 성병검사였으니 그 수치감은 일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겠다. 
기예를 자랑하던 기생들을 섬나라 게이샤와 같은 부류로 취급했으니 분노는 하늘에 닿았을 터, 치욕이었다. 이것이 기생들의 고귀한 존재성을 무시하고 기생들을 창기(娼妓)와 같은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 일제의 식민통제책의 본질이었고, 이를 꿰뚫어 본 기생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하다.

▲ 들불같은 저항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기생단속령' 등과 같은 식민 통제에 대한 저항이다. 수원기생들은 만세운동 전 고종황제의 승하를 슬퍼했다. 고종의 승하가 발표되자 전국의 기생·광대 배우들은 모두 휴업을 하고 근신에 들어간다. 그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 백성들이 모여 곡을 할 때 동참했다. 

수원기생들 역시 1919년 1월 21일 고종 승하일에 일절 가무를 중단하고 근신했다. 그 후 1월 27일 성복(成服)에 참례한다. 20여 명의 수원기생들은 깃당목의 소복을 입고, 나무 비녀를 꽂고, 짚신을 신고, 오전 8시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대한문 앞에서 망곡한다. 이처럼 당시 기생들은 정치·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몸으로 행동했다. 책장이나 넘기며 입으로만 떠들던 서생(書生)들과 어찌 비교할까.

▲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다

자혜의원 앞에는 실제로 기생들을 단속하고 통제하던 일제의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위협적인 일제의 통치수단 앞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는 것은 기생들의 민족적 의기를 전세계에 드러낸 좋은 예다. 
이들은 일제 경찰에 의해 곧바로 체포됐지만 만세운동 후 주변 상인들은 가게의 문을 닫고 철시 투쟁을 벌였다. 또 노동자와 상인, 청년 학생들은 하나가 돼 일본인 상점과 관공서에 돌을 던지며 건물을 파괴하고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기생들의 의거(依據)가 이 지역 만세운동의 모범이 된 것이다.

▲ 광복 70주년 수원시에 거는 기대

최근 수원시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만세운동과 축제한마당, 상징물 건립 등 지역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사회 통합을 위한 다양한 기념사업을 연중 추진하기로 했다.
염태영 시장이 직접 나서 각계각층 인사로 구성된 수원시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하고 기념사업 등을 추진한단다.
또 이를 통해 '팔달산 횃불시위와 수원 기생 김향화 등의 만세시위를 재현, 일제 강점기 수원에서 벌어진 항일운동 역사를 후세들에게 생생하게 알릴 계획'이라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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