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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중시했던 임금 정조
최형국/사학박사, 중앙대 강사
2015-05-15 16:35:55최종 업데이트 : 2015-05-15 16:35:55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이라 하여 재위했던 국왕의 시대에 따라 당대의 정책적 사안 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지리, 풍속 등 수많은 정보를 한 공간 안에 담아 놓았다. 
특히 왕조국가였기에 국왕의 몸짓과 말 한마디는 역사 그 자체였기에, 일거수일투족까지 '승정원일기'라는 일종의 국왕 직속 비서실 일기를 통해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치러진 수많은 행사들은 의궤(儀軌)라는 이름으로 준비단계부터 실행 후 소요경비까지 세심하게 자료로 남겼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록은 반드시 후세가 보고 다시금 평가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기에 그 어느 것보다 정확하고 명료하게 남겨 놓아야만 했다. '조선'이라는 봉건국가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이 존재하지만, 단일한 왕조국가가 500년의 장구한 시간을 버텨냈다는 것은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조선은 기록의 힘으로 버텨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국왕 중 가장 기록에 심취하는 국왕은 다름아닌 정조(正祖)였다. 정조는 왕세자로 책봉된 후부터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라는 이름으로 글을 남겼고, 이후에는 '일성록(日省綠)'이라는 국왕일기까지 내용을 추가하여 후세에 남겨 놓았다. 
또한 자신이 신하들과 나눈 간단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직접 지은 시나, 문장을 비롯한 모든 글들을 한 곳에 묶어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였다. 그 분량이 모두 184권 100책으로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래서 18세기 정조시대를 공부할 때 가장 요긴한 사료로 활용되곤 한다. 심지어 각 건물에 이름을 붙이는 편액에도 상세한 설명을 남겨 후세에게 도움이 되게 했을 정도다.

그 중 화성(華城) 여기저기에 걸린 편액에 대한 설명들도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다. 화성의 편액들은 대부분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짓고 신하들에게 설명을 해줄 정도로 가장 의미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는 중국의 한 고조(漢 高祖)의 고향이 패현(沛縣) 풍읍(豐邑) 중양리(中陽里)였는데, 천하를 평정한 뒤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옛 진(秦) 나라의 여읍(驪邑)을 풍읍의 거리와 똑같게 고치고 풍읍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신풍(新豐)이라고 이름붙인 것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에게 화성은 다시 새롭게 세운 고향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한 걸음 더 설명을 붙이자면,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겼기에 아버지께 새로운 고향을 선물해드린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바로 앞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 중 하나를 중양문(中陽門) 이라고 붙인 것이다. 

기록을 중시했던 임금 정조_1
화성행궁 노래당(老來堂)-'늙어서 돌아오리라'. 정조는 태종을 꿈꿨다. 늘 마음에 품었던 세종에 대한 존경감은 자신이 상왕이었던 태종처럼 아들 순조에게 풍요로운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갈등을 내가 끊을 테니 오로지 너는 성군이 되거라'라는 태종의 일갈처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려 했던 것이 정조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해 더 아쉬운 공간이기도 하다. 비록 작은 편액이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기록

화성행궁의 봉수당(奉壽堂)과 장락당(長樂堂)이라는 편액 또한 을묘년(1795, 정조19)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붙인 것이다.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며, 여기에도 생부인 사도세자가 어머니와 동갑이었기에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더한 것이기도 하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은 산의 이름이 팔달이므로 문도 팔달이라고 하여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이는 뜻을 담은 것이고,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은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원침을 바라보아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리는 뜻을 취한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은 굽이치는 용의 형상을 담은 것이고, 화서문(華西門)은 그 방향을 분별한 것이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꽃이 핀 산과 버들이 늘어진 냇가의 뜻을 취한 것이다. 화성 이곳저곳에 펼쳐진 편액만 가지고서도 정조시대의 한 면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후세들에게 어떠한 기록을 남길지,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늘 조심스럽게 생각하며 이 시간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선 최고의 폭군인 연산군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역사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역사는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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