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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앞에서 빙빙 돌고 있다네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5-06-06 08:41:41최종 업데이트 : 2015-06-06 08:41:4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선인들은 이사 갔을 때 액운 없이 복록을 누리고자 제사를 지냈으며 이를 신앙으로 숭배하였다. 지금도 이사한 뒤에는 시루떡을 해서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택리지(擇里志)에 보면, "살 곳을 택할 때에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에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다음에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은 아니다."고 하였다. 형편상 이런 곳을 얻기란 쉽지 않다.   

육이오 사변으로 나는 대구, 부산으로 원치 않은 이사를 하였다. 휴전 후 다시 서울로, 그리고 직장 따라 수원으로, 신풍동, 화서동, 매탄동 등에서 30여년을 지냈다. 
오랫동안 매탄동에 지내다가 지난 2009년 충남 서천의 농촌마을로 흘러들어 3년 동안 수도생활(?)을 한 뒤 화성시에 주민등록을 하고 이번에는 수원 파장동 7080 옛 슬래브 단층집으로 오게 되었다. 흙냄새를 좋아 하던 차 이곳에 손바닥만 한 화단이 있어 덥석 결정을 하게 되었다.  

전후좌우 이웃집이 모두 이층 이상이어서 무인도에 고립된 상태다. 이사 계획이 확정되자 내가 한 일은 고르고 골라 책 이십 여 박스를 재활용으로 보내고, 옛 옷, 옛 사진도 보면서 새로운 곳에서 어떤 인생을 꾸려갈까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 한다는 것은 항상 심란한 마음이지만 낯선 곳에 적응하려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씩 새로운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며가는 것도 흥미롭다. 허름한 구옥 좁은 거실에 영조 즉위년 보다 더 오래 되었을법한 3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탁자를 놓으니 걸어 다니기도 힘들다. 빈티지 탁자는 창가에 두고 각종 액세서리를 올려놓는다. 거실 벽지 대신 하얀 페인트칠을 하고 일부는 편백나무 판재를 붙였지만 옹색한 다락은 부서질까 조심스럽다. '헌책방'(서재)은 너무 좁아 다시 책을 정리하여 10여 박스를 고물상에 주고, 신선이 되어 거주한다는 '선교유거'(仙嶠幽居)를 향나무 판에 직접 파 달았다. 

선문(禪門) 앞에서 빙빙 돌고 있다네 _2
선문(禪門) 앞에서 빙빙 돌고 있다네 _2

녹슨 철문은 다시 푸른 색 페인트칠을 하고 시멘트 블록 담 안쪽은 레몬 색 페인트칠을 하였다. 여유가 닿으면 담장에 개, 고양이, 파초 등 미리 생각해 둔 그림을 그려 놓을 작정이다. 좁은 화단에는 원추리 등 야생화, 꽃잔디, 살구, 대추나무를, 현관 앞에는 매화를 심었다. 담장 밑에는 담쟁이덩굴, 능소화도 심고, 한편으로 미니 장독대도 만들었다. 집안정리가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주위로 부터 '어떤 연유로 파장으로 이사했느냐 이야기를 들으면'(聞余何事棲芭長)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해도 마음은 마냥 한가롭다'(笑而不答心自閑). 왜냐하면 '효심어린 소나무 도처에 있으니'(孝心老松到處有) '이곳은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이기 때문이다'(別有天地非人間). 툭하면 이태백의 '산중문답'을 빌려 '선문답'을 지껄여댄다. 

파장? 정조가 만석거를 만들어 연꽃과 파초를 심으니 그때부터 파장(芭長)이라 부르네. 서둘러 정조가 그린 파초그림을 찾아보고, <무수한 푸른 부채를 몸에 두르고 있으니, 바람이 불어오지 않을 때도 절로 서늘하구나'(繞身無數青羅扇,風不來時也自涼)> 양만리(楊萬里)의 영파초(詠芭蕉)를 생각하여 파초그림도 구했다. 여기에다 백거이(白居易)의 행년사십오(行年四十五)를 들먹여 <늙어서 더욱 천명에 의탁케 되어 편안히 거처하는 곳이 바로 고향이라> <혹 기회 된다면 내년 봄쯤 여산 기슭에 초당이나 엮어볼까?> 

선문(禪門) 앞에서 빙빙 돌고 있다네 _1
정조대왕 파초도

그렇다면 노후에 술 마시며 살아가려는 이곳이 바로 여산 기슭이 아니런가? 이참에 막걸리 두어 잔 마시고 스스로 묻는다. '한 평생 수도하여 무엇을 이루었느냐?'(修道平生何事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미완성'이다. '아직도 선문 앞에서 빙빙 돌고 있다네'(仍然盤旋禪門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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