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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 임면수 선생, 그를 기억하라
최형국/사학박사, 수원시립공연단 상임연출
2015-07-18 11:11:28최종 업데이트 : 2015-07-18 11:11:2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1912년 2월, 서간도
영하 20-3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만주를 향하여 한 가족이 망명을 떠났다. 조국의 땅은 남에게 빼앗겨 겨울바람조차 더 매서웠다. 
젖먹이 아기는 등에 업고, 예닐곱 살 즈음되는 어린자식들을 양손에 붙들고 두 부부는 힘겨이 한걸음을 떼어내며 그렇게 만주 환인현 횡도천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찬바람만 가득한 황량한 벌판이었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만은 결코 식지 않았다. 그 뜨거운 가슴이 무장 독립투쟁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로 전해졌고 조국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그가 필동 임면수 선생이다.

필동 임면수 선생, 그를 기억하라_1
'필동 임면수' 선생의 모습

필동(必東) 임면수(林冕洙) 선생.
그는 구한말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계몽운동가였다. 조국이 외세의 압력에 풍전등화라는 위급한 상황일 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자강운동을 펼친 민족사상가이기도 했다. 특히 근대 학교인 수원의 삼일학교(三一學校)의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아니 미래 독립운동의 씨앗이 될 학생들을 키워내기 위하여 학교 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수원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의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위로는 중국과 러시아, 아래로는 일본, 거기에 밖으로는 영국과 미국 등 수 많은 나라들이 조선을 집어 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면수 선생은 수원을 떠나 서울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으로 옮겨 활동 영역을 넓혔다.  
특히 상동청년학원에서의 공부와 활동 속에서 민중∙민족 목회자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비롯해 이동휘(李東輝), 이회영(李會榮)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과의 만남을 가졌고 보다 구체적인 항일독립투쟁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국내에서는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젖먹이와 갓 걸음마를 뗀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만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수원에서 대표적인 부자로 이름날 정도였고, 그 역시 일본어에 능통하였기에 충분히 세상과 타협할 수 있었지만, 그는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받쳤다. 

그는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개교한 제2의 신흥무관학교인 양성중학교(養成中學校) 교장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다. 이후 조국에서 펼쳐진 3·1운동을 만주지역까지 확장시켰으며, 무장 결사대의 일원으로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통화현에서 해룡현(海龍縣) 일제에 의해 체포 투옥되었다. 
수없이 이어지는 고문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간신히 풀려났지만, 그는 또다시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와 교육운동과 다양한 시민운동을 전개하며 쉼 없는 독립운동의 빛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외쳤던 조국 독립의 열망을 가슴에 안은 채 안타깝게도 1930년 12월 숨을 거뒀다. 임면수 선생은 수원지역뿐만 아니라 한국독립운동사상 재평가되어야하는 가장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현시점에서 가장 선행되어야만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란 없다"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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