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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武人) 정조, 깍지를 말하다
최형국/역사학 박사, 무예24기연구소장
2013-10-07 15:33:26최종 업데이트 : 2013-10-07 15:33:2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깍지(角指)'라는 것이 있다. 
문자 그대로 손가락에 낀 뿔이라는 도구로 우리나라의 전통 활을 쏠 때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그래서 전통시대에는 깍지 낀 손이 무인을 상징하는 도구이자, 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국왕들 중 활에 가장 많은 애착을 보인 국왕이 바로 정조다. 그는 틈만 나면 어사대(御射臺)에 올라 커더란 곰의 얼굴인 웅후(熊侯)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모습을 열살 어린 아이의 눈으로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정조. 그리고 비록 성인이 되어 국왕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제대로 된 권력 기반을 갖추지 못해 힘겨워 했던 세월을 화살에 담아 날려 보냈다.

그렇게 지극한 마음을 화살에 담아 보내니 어찌 명궁이 안 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실력은50발 화살 중 단 한발만 빗나가는 49중의 실력이었다. 국궁은 보통 화살 다섯 개를 한 순(巡)이라고 하여 한 순을 쏘고,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한 순을 쏘는 방식이다. 

특히 정조가 못 맞춘 화살 한개는 본인의 겸양을 알리기 위해 미덕을 발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가히 하늘이 내린 신궁의 실력이다. 필자도 10년 넘게 활을 즐겨 쏘는 한량 중 하나지만, 그 실력은 가히 범접하지 못한 경지로 보인다.

그러하기에 깍지는 정조에게도 '무(武)'에 대한 상징이자, 군권(軍權)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조 1년 5월 어느 날, 국왕의 새로운 통치전략과 비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모든 신하들에게 과감하게 매일 깍지를 끼고 생활하도록 명령하였다. 심지어 태어나 단 한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던 문관들에게도 예외없이 실천하도록 하였다. 

특히 선현의 일화 중 깍지를 하도 오랜 세월 끼고 생활해서 깍지가 엄지손가락과 완전히 붙어버린 이야기를 하며 그것이 진정한 신하된 자의 도리라고 열변을 토했다. 언제든지 활을 잡고 화살을 쏠 수 있는 자세, 그것이 거대한 청나라 옆에서 자주국임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이런 강력한 군권 강화 전략을 위하여 즉위하자마자 갑옷을 입은 장수는 국왕 앞에서도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령을 내려 전장을 지키는 장수의 품격을 높여주는 일을 추진하였다. 갑옷을 입은 장수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하된 자의 도리보다 장수로써 국가를 지키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한 국왕이 바로 정조였다.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일궜던 국왕 정조의 첫 번째 정치 전략은 강력한 군권확보와 군사력 확충이었다. 문화가 아무리 융성한 시대를 맞이한다 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힘이 없다면 한낱 모래성 쌓기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수원 화성의 경우도 그저 외형적 아름다움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곽 본연의 의미를 좀 더 충실하게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의 도시를 꿈꾸는 수원에서 '무(武)'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 그리고 몸에 대한 진솔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수원이 무향(武鄕-무의 고향)으로 불린 것이다. 

무인(武人) 정조, 깍지를 말하다_1
필자의 손에 낀 깍지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활은 바로 이 깍지가 있어야만 활을 쏠 수 있었다. 전통시대 깍지는 무인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정조는 모든 신하들이 깍지를 끼고 생활해야 국가의 안위가 보장된다고 설파하였다. 멀리 수원 화성의 핵심 지휘소인 서장대가 보이는 화성행궁 북군영에 앉아 정조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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