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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에게 많은 술을 사 주었다’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5-07-12 13:49:43최종 업데이트 : 2015-07-12 13:49:4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어제 밤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퍼 마셨다고 자랑(?)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전혀 삐뚤어진 코가 아니다. 새벽녘 쯤 다시 반듯해 졌을까? 그런데 왜 코가 삐뚤어지게 마셨다고 하는 걸까. 난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그렇게까지 마신 기억은 없다. 아마도 못난 코나마 삐뚤어지는 것이 겁나서 그랬을 게다. 

한국의 3소(三蘇), 변 씨 삼형제 중 막내인 수주 변영로는 암울한 일제시대 청동시인 공초 오상순 등과 함께 성균관 뒷산에서 대낮부터 술에 만취하여 발가벗은 채 소등을 타고 종로 거리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주선 변영로의 '명정40년'에 나오는 이야기다. 
시인 조지훈은 주도유단(酒道有段)이라 하여 술꾼을 18단계로 분류하기도 했다. 동심의 시인 천상병은 하루를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낸다. 술값은 만나는 사람에게 손바닥을 보여 얻어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수 김인 9단이 가장 많이 뜯기었다나.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술을 가까이했다 하더라도 이들 주선(酒仙)들 앞에서 술 이야기를 꺼낼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비록 주력(酒力)은 약하지만 술을 가까이 한 지는 벌써 50년이 넘으니 어찌 애주 일화가 없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난 아버지에게 공식적으로 음주허락을 받고 주인(酒人)에 입문한 사람이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만찬(?)을 할 즈음 아버지께서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했으니 술도 좀 마셔야 한다고 하시면서 친구들에게도 막걸리 잔을 돌리셨으니 그야말로 고교 졸업 공식주인으로 발탁된 셈이다. 물론 그전에야 술맛도 모르면서 몰래몰래 막걸리 한두 잔씩 포장마차에서 마신 적은 있지만 그거야 어디 술 마셨다고 할 수 있나. 

학창시절 자연스럽게 인가 받은 음주 행사를 시작한다. 오후쯤이면 강의와 상관없이 주점을 돌기도 한다. 용돈이 궁하니 학교 앞 목로주점으로 향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 시절 주점에는 어김없이 수작(酬酌)하는 아가씨가 한 명쯤은 있었다. 안주는 대부분 서비스 차원의 김치만을 이용하지만 학생 처지를 감안한 눈치 빠른 아가씨는 술잔을 뒤집어 놓기가 일쑤다. 대낮부터 엄청나게 마셔대지만 2차는 없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고 용돈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2차는 없고 자정 전에 귀가하는 습관이 남아있다. 
  
어느 날 오 아무개와 허름한 목로주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 아무개는 190cm의 장신에 엄청난 주량을 가진 배구선수로 둘은 초저녁부터 빛의 속도로 막걸리를 쏟아 부었다. 시간이 지나자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그야말로 인탄주(人呑酒)를 넘어 주탄인(酒呑人) 현상이 온다. 
그런데 휑하니 기막힌 안주가 눈에 띈다. 취중에도 좋은 안주는 눈에 잘 보이는 법. 얼른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려하자 갑자기 비명소리가 난다. 수작하는 여인이 질색을 하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취중에 색깔도 선명한 복숭아 두 개가 어렴풋이 보여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한복 저고리에 젓가락을 찍어 댄 것이다. 아마도 가슴 부위를 평상시보다 더 넓은 면적으로 들어냈었나 보다. 

이튿날 아침 재차 음주 행각에 들어간다. 작취미성(昨醉未醒)에 가음(加飮)이니 대낮에 대취, 시내를 횡보한다. 다분히 소변이 급해진다. 이때 눈에 들어온 긴 담장. 흐느적거리며 행사를 치른다. 경찰서 정문의 경비가 보지 못했는가? 아무런 제재도 없다. 

'천지가 이미 술을 사랑하였으니 술을 사랑하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天地旣愛酒 愛酒不傀天) 라고 한 주선(酒仙) 이백(李白), '취해 얻는 즐거움을 깨어있는 이에게 전하지 말지어다. 어찌 술을 모르는 사람이 술맛 나는 세상살이를 알리오?' 

나는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하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은 나에게 그토록 많은 술을 사주었는데 그때는 왜 몰랐었을까?'.

'인생은 나에게 많은 술을 사 주었다'_1
'인생은 나에게 많은 술을 사 주었다'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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