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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죽음과 초여름
최형국/역사학 박사, 무예24기연구소장
2013-06-02 13:12:09최종 업데이트 : 2013-06-02 13:12:0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英祖)가 용상에 오른지 38년, 1762년 윤 5월 13일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혔다. 그리고 8일 동안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을 넘기지 못하고 그 좁디좁은 뒤주 속에서 젊음을 끝내야 했다. 그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꽃다운 청춘 28세. 그가 뒤주에 갇히던 날을 요즘의 양력으로 계산해보면 초여름의 폭염이 시작되는 6월 어느 날이 될 것이다. 

요즘처럼 더운 날 한 평도 안 된 넓이에 쭈그리고 앉아 8일간 갇혀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제 정신으로 그 상황을 받아 드리는 사람은 없을게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이 않던 아들의 목숨을 그토록 참혹하게 빼앗으라는 엄명을 내렸는지 아비인 영조의 심정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날의 사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역사에서는 임오년(壬午年)에 일어난 재앙 즉, '壬午禍變(임오화변)'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선 최대 비극의 주인공이 사도세자라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초여름_1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전 도록] 지난해는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였다. 정조가 수원 화성 건설의 첫 번째 이유로 손꼽은 것이 바로 아버지가 누워계신 현륭원(현 융릉)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기리기 위해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사도세자 추모 특별전을 열고 관련 도록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설'들이 아직도 세상에 공존하고 있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누구는 '정신병이 심각해서', 누구는 '군사반란을 모의해서', 또 다른 이는 '집권세력과의 갈등이 심각해서' 라는 등등의 이야기들이 아직도 쉼 없이 쏟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영조는 아비와 아들의 관계로 그의 목숨을 취하지 않았다. 오로지 국왕과 다음 국왕의 자리를 승계할 세자라는 권력의 중심축 관점에서 세자를 죽음에 몰아넣었다. 그토록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또한 단순히 영조와 사도세자의 1:1의 관점에서 그 사건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가는 분명이 임금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신하와 반드시 함께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중대사는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과의 논의를 거쳐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 왕으로 내정된 세자의 죽음에 과연 그들이 관여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노론이니, 소론이니 당색을 이야기하며 뭉뚱그려 이 부분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임오화변이 있기 전, 꼭 3년 전에 있었던 영조와 정순왕후와의 결혼을 보면 이 비극적 사건의 시작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영조 35년 6월에 66세의 국왕과 15세의 경주 김씨의 딸이 혼례를 올린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25살.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새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세자의 심정은 참 묘했을 것이다. 여기에 영조는 다음 달인 윤 6월에는 손자(정조)를 원손(元孫)에서 차차기 국왕후보인 세손(世孫)으로 지위를 올려주었다.

다시 말해 사도세자가 아니더라도 국왕에 오를 사람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료를 보면, 이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사도세자는 말 그대로 아버지의 처사에 대해 격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때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심각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여기에 외척가문의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지면서 세자는 뒤주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 된 것이다. 

지난 5월 7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정조의 효성과 노인공경'이라는 주제로 작은 전시회를 9월까지 진행할 예정에 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 정도가 되는 10살의 어린 정조의 눈으로 아비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하였다. 
아비의 참혹한 죽음 앞에 눈물조차도 마음껏 흘리지 못한 정조의 가슴에 아버지에 대한 '孝(효)'는 너무나 큰 상처였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 어떤 국왕보다도 더 자주 그리고 더 깊이 효를 실천하려 했던 국왕이 정조다. 

단순히 왕실 웃어른에 대한 효성은 기본이고 전국의 노인에 대한 공경을 정책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몸부림을 펼친 것이다. 아마도 그래야 자신의 불효를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의 효에 관한 글과 그림을 비롯하여 모두 17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으니, 시간을 내어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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