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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속 더욱 간절한 정조의 애민정신
최형국/역사학 박사, 무예24기연구소장
2013-08-25 13:17:02최종 업데이트 : 2013-08-25 13:17:0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연일 찌는 듯한 폭염 속에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쳐 간혹 불어오는 가을을 알리는 시원한 바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요즘이다. 
거기에 사상 최악의 전력난으로 공공시설에서는 냉방기의 전원을 끄고 업무를 보고,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기업에서는 생산라인의 일부를 정지시키는 등 초강수의 전력확보 전쟁까지 펼쳤기에 그 피로함은 아직까지 여전하다. 

1794년 음력 7월, 그때도 그렇게 폭염이 심했다. 그해 2월 28일 오전 7시부터 화성의 4대문중 남문과 북문에 해당하는 팔달문과 장안문의 터 닦기를 시작으로 화성(華城) 성역 공사도 주춧돌은 세워 놓았지만, 여름으로 들어서자 폭염 앞에서 연일 일꾼들이 쓰러져야만 했다. 조선의 백성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정조의 마음은 솔직히 급했다. 폭염 속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을 쌓아 수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개혁정치를 시험해 보고자했기에 튼튼한 화성건설은 그 무엇보다 절박한 사안이었다. 

궁궐에 국왕을 암살하기 위한 자객들이 판치고, 반대파인 노론은 연일 화성건설에 대한 불만이 목구멍 저 깊이에서 들락날락 거릴 정도였으니 정조의 초초함도 폭염처럼 날로 커졌으리라. 
그러나 그해 7월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그때, 정조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자 했던 화성건설의 핵심 공정에 중지명령을 내렸다. 성을 쌓는데 반드시 필요한 돌을 떼어내는 작업과 기와를 굽는 일을 멈추라 하였다. 오직 백성들이 따가운 햇볕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왕이 아비처럼 조선의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한 것이다. 

폭염 속 더욱 간절한 정조의 애민정신_1
'불취무귀(不醉無歸)'-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말라. 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술자리를 할때 했던 일종의 건배사다. 붕당의 폐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술을 가지고서라도 풀고자했던 정조의 고육지책이 보인다. 그러나 백성들과는 '투료(投醪)'의 마음으로 보살피려 했던 국왕이 정조다. 남문시장 앞에서 술을 따르는 정조의 두 갈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진다.

이집트의 피라밋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모두 그 크기만 보더라도 엄청난 위용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백성들의 피가 묻어 있다. 지배자들의 희망이 깃들었을지언정, 백성들의 지독한 절망이 담겨있다. 심지어 성곽 건설 작업 중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바닥에 채워 넣으며 그렇게 엄청난 건축물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폭염이 맹위를 떨쳤던 1794년 그해 여름, 화성을 쌓던 조선 백성들은 국왕이 내린 더위를 식히는 탕약을 마시며 잠시 쉬어 갈 수 있었다. 
정조는 이 약을 내리며 '투료(投醪-막걸리를 던지다)'라는 의미를 붙였다. '투료'는 고사성어로 장수가 선물로 받은 술 한동이를 흐르는 냇물에 부어 군사들과 모두 함께 나눠 마셨다는 의미다. 이 얼마나 멋진 나눔의 철학인가! 

그리고 그날 마지막 이야기는 "이 화성을 건설하는 사업은 일마다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는데 힘써야 한다."라는 명문을 남겼다. 백성들이 기뻐하고, 백성들의 힘이 펴지게 해야 만이 정조가 그토록 바라던 튼튼한 화성건설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당대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된 국책 핵심사업 화성 건설은 그렇게 백성의 기쁨 속에서 완성되었고,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우리를 보듬어 안고 있다. 정조의 리더쉽은 바로 백성을 아끼는 애민정신에서 출발한다. 무릇 지도자는 그래야 한다. 비록 왕조국가였던 그때도 그의 권력이 오직 백성들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당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3년 오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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