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멋진 승자들을 만나고 싶다
윤수천/동화작가
2014-12-08 12:48:43최종 업데이트 : 2014-12-08 12:48:4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어젠 문득 아주 오래 전에 본 복싱 경기가 생각나서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혔다. 하도 오래 돼서 선수 이름조차 까먹었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타이틀 매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패를 자랑하는 챔피언과 이에 맞서는 신예복서의 경기는 첫 라운드부터 불꽃 튀는 접전이었고 관중들은 이들의 투혼에 열광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5회를 넘기지 못한 채 챔피언의 TKO승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정작 더 큰 승부는 이후에 벌어졌다. 그것은 TKO승을 거둔 챔피언이라면 길길이 뛰며 기쁨에 도취하는 게 보통인데 이 챔피언은 갑자기 패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숱한 복싱 경기를 보았지만 하도 이상한 일이어서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해설자의 말이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저것 좀 보세요. 챔피언이 울고 있네요. 도전자가 뜻밖의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는 것을 보자 동료인 입장에서 안타까워하고 있군요. 정말 멋진 챔피언입니다."

그날 텔레비전으로 이를 지켜보던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쳐주었던 기억이 난다. 운동 경기 가운데서도 특히 복싱은 그 어느 경기보다도 승자와 패자가 확연하게 판가름이 나는 경기다. 특히 KO나 TKO일 경우에는 그 판가름이 극에 달해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나 역시 복싱 경기를 즐기면서도 어느 때는 너무 비정하고 잔인해 보이는 장면 때문에 보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그 경기를 보고는 왜 그리 가슴이 뭉클하고 서늘하던지! 이건 단순한 운동 경기를 넘어 인간 드라마란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감동적인 장면은 연출자뿐 아니라 관람자에게 더 큰 행복감을 준다. 캔버스 위에 벌렁 드러누운 패자를 곁에 둔 채 기고만장해하는 승자의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그런데 나는 그날 그보다 몇 배 더 멋진 장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승리를 거머쥔 순간,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먼저 패자에게 달려가 위로해 주는 승자의 모습은 스포츠맨십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나날이 경쟁 일변도로 치닫는 각박한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날의 복싱 경기가 그리워진다. 최선을 다해 싸워준 상대를 위해 감사하고 불의의 부상으로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을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면서 위로해 주는 승자의 모습은 비단 링 위에서만 요구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삶이 있는 현장에서는 어디든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승자 쪽보다도 패자 쪽이 훨씬 많을 것으로 안다. 한 사람의 승자가 생기면 이에서 탈락한 패자는 서너 명에서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이 될 것이다. 대학 문이 그렇고, 취직 문이 그렇고, 우리네 인생 삶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새 연말이다. 한 해 동안 자신의 삶에서 승자라고 판단되는 이들에겐 흐뭇한 연말이 되겠지만, 패자라고 생각되는 많은 이들은 연말이 더없이 춥고 쓸쓸할 것이다. 이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연말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승자들의 너그러운 마음과 배려와 행동이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본다.

살아보니 인생의 길에는 승리만 주어지는 게 아니다. 때론 좌절도 따르고, 곤경과 역경도 끼어들고, 절망도 앞을 가로막는다. 이때 축 쳐진 어깨에 힘을 불어넣는 따뜻한 말 한 마디, 주저앉은 이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위로의 마음은 더불어 사는 이들의 도리요 책임이 아닐까 싶다. 

 멋진 승자들을 만나고 싶다_1
멋진 승자들을 만나고 싶다_1

'바람 부는 날/들에 나가 보아라/풀들이 억센 바람에도/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풀들이 바람 속에서도/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굳게 잡아주기 때문이다//쓰러질 만하면/곁의 풀이 곁의 풀을/넘어질 만하면/곁의 풀이 곁의 풀을/잡아주고 일으켜주기 때문이다//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이것이다/우리가 사는 것도/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졸시 /바람 부는 날의 풀'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