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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발레리나의 발
윤수천/동화작가
2014-08-17 12:53:15최종 업데이트 : 2014-08-17 12:53:15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우연히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한 중견 연극인의 서재에 걸린 강수진 발레리나의 발 사진을 보게 되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섬뜩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으니 저게 그 아름다운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발이라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랬다. 그 발과 무대 위의 춤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저렇게 못 생긴 뒤틀린 발에서 어떻게 천상의 춤이 나올 수 있을까. 난 믿어지지가 않아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꼭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았다. 저 발이 저렇지 않고 예뻤다면 결코 천상의 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흙탕물 속에서 만이 저 아름다운 연꽃이 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발은 우리 신체에서 좀처럼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부위이다. 일반인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은 더더욱 그럴 줄 안다. 강수진도 예외가 아니어서 언젠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고백한 바 있었다. 기자가 발을 좀 보여줄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뒤틀린 발로 인해 혹시라도 관객들의 춤에 대한 감상이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움으로 보였다. 

어느 발레리나의 발_1
MBC-TV 화면 캡처

어찌 발레리나의 발뿐이겠는가. 운동선수들의 발도 하나같이 엉망일 것이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힘들고 고된 훈련을 소화하다 보면 발이 성할 날이 있겠는가. 운동선수뿐이 아니다. 매일 우편가방을 둘러메거나 오토바이에 싣고 거리를 질주하는 집배원들의 발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이들 말고도 성하지 못한 발을 가진 이들은 셀 수없이 많다. 생업전선에서 뛰는 평범한 이들의 발도 그 어느 발이고 다 그럴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발처럼 정직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처럼 성실함과 신뢰를 보여주는 것도 없다고 믿는다. '책상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말고 발로 뛰어라'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고 본다. 

오래 전에 들은 재미난 얘기가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분으로 그는 젊었을 적에 기자 생활을 했다. 하루는 데스크로부터 임무가 떨어졌는데 모 대학교 졸업식을 취재해서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단다. 그는 임무를 맡는 순간 오늘 기사는 수월하게 쓸 거라는 생각부터 했단다. 그래서 대학교에 취재하러 가는 대신 찻집에 앉아 전화부터 걸었단다. 오늘 졸업생이 몇 명이며, 누가 어떤 상을 받느냐. 기사에 필요한 이런저런 것을 알아낸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를 마신 뒤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넘겼다. 

그런데 다음날이었다. 출근을 하자마자 데스크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기사를 썼느냐는 것이었다. 그 대학교는 마침 강당을 마련하기 위해 동문들로부터 기부금을 걷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졸업생들이 강당에서 성대히 졸업식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던 것이다. 이 기사를 본 그 학교 졸업생들이 학교에 전화를 걸어 거센 항의를 했다는 것.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기자 생활을 하는 내내 '현장 확인'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고 했다. 현장 확인은 비단 기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닐 것이다. 우리들의 모든 삶에 필요한 철학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을 꽃피우는 '디딤돌'이란 생각도 든다. 

무대 위에다 천상의 춤을 펼치기 위해서 발레리나의 발은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발은 제 모양을 잃고 뒤틀리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 고통과 시련 위에서 우리의 눈과 가슴을 사로잡는 춤이 탄생하는 것. 어디 춤뿐이겠는가. 인생이란 꽃을 피우는 데도 고통과 시련은 따르게 마련이다. 이를 마다한다면 결코 자신의 꽃을 피울 수 없다. 

나의 발은 지금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발을 씻으며 한 번쯤은 눈여겨 볼 일이다. 그러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도정도 보일 터. 어떤 길을 걸어왔고 누구를 만났는지도 알게 될 터. 그러고 나서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걸어갈 것까지도 미루어 볼 수도 있을 터. 고된 훈련의 나날로 뒤틀린 강수진 발레리나의 발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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