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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일기'를 다시 읽다
양훈도/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
2013-09-16 11:27:26최종 업데이트 : 2013-09-16 11:27:2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여름일기'를 다시 읽다_1
사진/이용창

시를 읽고 싶어지는 걸 보니 가을인가 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이나, 시를 섬기는 이가 들으면 노여움을 탈 소리로되, 우리네 심성 메마른 인간이 시 생각을 떠올린 것만 해도 칭찬받을 일 아닌가 모르겠다. 성현 이르시기를 시 삼백편이면 삿된 생각이 사라진다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가을 시를 읽기는 아직 이르고 하여 여름 시 몇 편을 복습하였다. 그 중에 이해인 수녀님의 여름일기가 있다. 시에 살고 시에 죽는 이들도 수녀님 시 앞에서는 꼼짝 못하지 싶다. 우선 '여름일기 1'.

여름엔
햇볕에 춤추는 하얀 빨래처럼
깨끗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한 태양아래
나를 빨아 널고 싶다. 

여름엔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향기로운 땀을 흘리고 싶다.
방울마저도 노래가 될 수 있도록
뜨겁게 살고 싶다. 

여름엔 
꼭 한번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에 가서
오랜 세월 파도에 시달려온 
섬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침묵으로 엎드려 기도하는 그에게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오고 싶다. 

지난여름 나는 바다에 가지 못했다. 침묵처럼 엎드려 기도하는 섬을 보지 못했다. 이리 저리 바쁘다는 핑계를 댔으나, 그렇다고 포도송이처럼 향기로운 땀을 흘린 것도 아니다. 요즘 마음이 흰 빨래 같지 않은 걸 보면.

"오늘 아침/ 내 마음의 밭에는/ 밤새 봉오리로 맺혀있던/ 한 마디의 시어가/ 노란 쑥갓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여름일기 2' 첫 연이다. 반백이나 되어서야 쑥갓꽃의 아름다움을 알았던 나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수녀님의 시가 새삼 쑥갓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사는 지구 위에도/ 수박처럼 둥글고 시원한/ 자유와 평화 가득한 여름이면 좋겠습니다." 여름내 평화를 얘기했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노래하진 못했다.

반성은 '여름일기 3'에서 절정에 이른다. 내가 여름이 되었던 적이 있는가? 
"아무리 더워도/ 덥다고/ 불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땀을 많이 흘리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일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며/ 해 아래 피어나는/ 삶의 기쁨속에// 여름을 더욱 사랑하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수녀님은 수녀님이다. 뜨거워서 짜증만 나는 여름 해를 맞으면서도 이렇게 노래한다.  
"이왕이면/ 붉게 뜨겁게/ 살아야 한다고/ 어둡고 차갑고/ 미지근한 삶은/ 죄가 된다고/ 고요히 일러주는 나의 해님" ('여름일기 4' 좀 더 붉고 뜨겁게 살 걸. 언제나 그러했듯 때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여름의 한 복판에서 진작 읽었어야 했다.

※뱀발; 겨울 들머리에서 같은 후회를 하면 안 되지. 나이를 헛먹은 게지. 미리 시 한 편 꼭꼭 읽어두자.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가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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