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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오는 날이면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3-12-07 11:39:30최종 업데이트 : 2013-12-07 11:39:3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얼마전 모처럼 겨울 가랑비(細雨)에 젖었다. 비가 내리는 것도 무시하고 우산도 없이 뻣뻣해진 목을 치료하느라 한 시간 가까이 한의원에서부터 걸어 왔기 때문이다. 마침 모자도 안 쓰고 나왔기에 머리서부터 온 몸이 축축하다. 늘그막에 괜스레 허세를 부렸지만 폭우가 아니길 다행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아내는 '아니 우산도 안 가지고 나갔냐?'고 핀잔이다. 

가랑비는 세우(細雨)이다. 상춘곡에 보면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에 피어 있고 녹음방초는 세우 중에 푸르도다' 역시 세우는 봄바람에 날리는 것이 제격이다. 하지만 밤비(夜雨)는 가을에 어울린다. 
'귀뚜라미는 울다가 그치고 등잔불은 꺼질 듯 다시 밝아오는데, 창 넘어 밤비 내리는 줄 알았네.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듣고서'. 백거이의 야우(夜雨)이다.

영·정조 때 강우의 양에 따라 미우(微雨)·세우(細雨)·소우(小雨)·하우(下雨)·쇄우(灑雨)·취우(驟雨)·대우(大雨)·폭우(暴雨)의 8단계로 분류하고, 그밖에 잠깐 내리는 비는 사우(乍雨), 하루 종일 비가 오면 종우(終雨), 며칠이고 계속 비가 내리면 우달부지(雨達不止), 오전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오면 조청석우(朝晴夕雨), 날씨가 갰다 흐렸다 하면 혹청혹음(或晴或陰)이라 적고 있다. 요즈음 일기예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나는 내리는 눈보다 빗소리 듣기를 더 좋아한다. 내리는 눈은 잠시나마 세상의 험한 모습을 덮어 주지만 눈이 녹으면 이내 더러운 모습이 들어난다. 그러나 내리는 비는 눈에 띄는 더러움을 씻어 준다. 그래서 비 노래에 쉴 새 없이 귀를 혹사하기도 한다.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를 중얼거리며 비와 나, 비의 나그네, 어제 내린 비 등 7080 노래와 레인, 리듬 오브 더 레인,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주제곡 등 외국 곡에 귀가 멍하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가 파할 오후에 불쑥 비라도 내리면 학교 정문은 여분의 우산을 가지고 온 어머니들로 장사진을 친다. 꼬마 녀석들이 군 사열을 하듯 정문 양쪽에 늘어선 우산들을 보면서 걸어 나오면 어느새 우산 하나가 불쑥 튀어 나온다. 기다리던 모자, 모녀 상봉의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어린 동생들이 있어 혹시 오후에 비가 오더라도 어머니가 우산을 가지고 올 형편이 못됐다. 

그 날은 오후부터 무척 많은 비가 내렸다. 물론 나는 어머니 생각은 조금도 안하고 당당하게 정문을 나섰다. 억수비를 맞으며 골목 골목길을 지나다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아예 처마 끝 낙숫물에 정수리를 맞추고 온몸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즐기고 있었다. 

지나가는 이 아무도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양발 앞으로 또 다른 발이 다가온다. 고개 들어 마주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어머니였다. 억수로 비가 내리기에 틈을 내서 학교에 왔지만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보다 더 놀랐던 것 같다. 내 행색을 상상해 보라. 

김성탄은 많은 비에 길이 막혀 열흘 동안 벗과 함께 절간에 뒹굴다가 인생의 33가지 통쾌한 이야기 '쾌설(快說)'을 만들었다지만, 나는 국민학교 시절 많은 비를 피하기 않고 제법 티를 내어 눈을 내리깔고 구룡토수(九龍吐水), 관정식(灌頂式)의 무아지경에 빠졌었다. 오늘 다시 한번 티를 내려고 비에 젖었지만 놀란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우론(雨論)'에 보면, 봄비는 독서하기에 좋고, 여름비는 바둑 두기에 좋고, 가을비는 가방이나 다락방을 뒤지기에 좋고, 겨울비는 술 마시기에 좋다. 나는 감히 우신(雨神)에게 부탁해 보겠다. 일 년 열두 달 좍좍 비가 내리도록! 
행여 비 오는 날이면 우산 없이 비에 흠뻑 젖고 싶다.

겨울비 오는 날이면_1
겨울비 오는 날이면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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