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봄날, 춘궁(春宮)의 하루
최형국/문학박사,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시범단 수석단원
2014-03-30 11:19:17최종 업데이트 : 2014-03-30 11:19:1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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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의 뒤를 이을 세자는 책봉과 함께 다양한 왕실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후사를 이어야 하므로, 궁궐의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동쪽을 생활공간으로 지정하였다. 중국 선비 엄성이 그려준 홍대용 초상. 홍대용의 북경 여행은 그 자신에게도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 문화적 충격을 자양분 삼아 북학을 바탕으로 한 실학이 펼쳐진 것이다. 실학이 말하는 '비록 오랑캐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백성들의 일을 편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백성의 삶을 살찌우는 좋은 일이다'라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이 필요한 오늘이다. 그런 그가 정조의 세자시절 일종의 가정교사의 형태로 만나게 된 것은 북학에 대한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 것이었다. 세자는 서연(書筵)이라고 하는 일종의 대화식 공부를 지속하였다. 그 서연의 대화상대로 홍대용이 뽑혀서 정조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정조는 호학군주(好學君主)라 불릴 정도로 학문에 깊은 뜻이 있었기에 홍대용과의 대화는 그 자체로 세자인 정조의 갈증을 풀어주기 충분했다. 특히 홍대용이 연경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주면 세자였던 정조는 눈을 반짝거리며 깊이 빠져 들곤 했다. 문제는 당시 사회 지배층들이 북학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때라 서연에서도 쉽게 이야기할 부분이 아니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옛 속담처럼 혹여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국왕이 영조에게 고해 받친다면 경을 칠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들의 핵심에 개혁이 담겨 있었다. 홍대용은 청나라에서 보고 느낀 것 중 놀고먹는 사람은 줄이고 생산하는 자를 늘리는 사회 운영방식에 대해서 조리 있게 설명을 하였다. 정조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선후기 사회를 병들게 했던 과거제도, 신분제도, 관료제도에 대한 개혁의 청사진을 그리는 시간으로 풀어냈다. 이처럼 세자시절 정조의 봄날은 뭔가를 구상하고 배워가며 미래를 그려 보는 시간이었다. 자연 또한 봄날에 따스한 햇살과 양분이 여름의 신록과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충전의 시간이다. 정조는 그 봄날을 잘 채워 낼 수 있었기에 조선후기 가장 화려한 문예부흥과 사회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좋은 선생님이 필수적인 것이다. 제 아무리 타고한 사람일지라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올곧게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내 몸에서 춘곤증이 밀려오는 봄날이다. 그 봄날 좋은 선생님을 찾아 작은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보자. 아니면 좋은 책을 선생님 삼아 보다 의미 있는 봄날을 펼쳐보자. 혹시 누가 알랴. 그 배움의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을 만날지도 모른다.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봄날 우리 함께 두드려 보자.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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