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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선경
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2012-02-29 08:59:37최종 업데이트 : 2012-02-29 08:59:3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이선경(1902. 5. 25~1921. 4. 21)
경기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은 수원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이선경(李善卿, 1902~1921)에 대한 사실은 부정확한 것이 많았다. 
기본적인 생몰년에 대하여도 정확하지 않았고 학교관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선경은 홍석창의 글을 통해 1904년 4월 30일 태어난 것으로 잘못 알려졌고, 사망 시점도 1923년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홍석창은 수원지역의 중요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이선경을 손꼽아 널리 알렸다. 즉 이선경을 비롯하여 제암리 홍원식, 화수리의 정서송, 수촌교회의 김교철, 사강의 문상익, 오산의 이성구, 발안의 이정근, 태안의 황창오 등을 수원지역의 중요한 운동자로 간략하게 정리함으로써 새롭게 발굴한 셈이었다. 

이선경의 제적부 이선경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언론인 김운성씨의 저널리즘적 저술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선경이 3.1운동의 만세시위로 잡혀 순국한 것으로 잘못된 사실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일반인들에게 이선경의 존재를 처음 알렸다. 더욱이 "옛일을 더듬는 고로들(당시 10~15세)은 李여사를 곧잘 柳寬順여사에 비한다. 비록 옥사는 아니지만 숨을 거두다시피 하여 출옥한 그는 집에 닿자마자 숨졌으니 유관순 여사에 못지 않은 순국열사라는 것이다."라고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선경을 유관순에 비교한 점이다.

이선경은 1902년 5월 25일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 406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서 2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제적부에 처음 기록된 이름은 '애기(愛基)'였으나 '善卿'으로 고쳤고, '간난(看蘭)'이었던 언니는 '현경(賢卿)으로 바꾼 것은 1916년의 일이다.
당시 양가집 딸들은 처음 태어나서 '간난이', '아기' 등으로 불리다가 조금 크면 아래 사람들은 '아기씨'로 불렀고, 좀더 크면 '아가씨'로 불리다가 결혼하면 밖에서는 '새댁' '○○(수원)댁'의 택호로 불렸고, 안에서는 '마님'으로 불렸다. 당시 숱한 간난이와 아기·애기 등의 이름이 1909년 『민적부』에 오르는데, '兒只', '愛基' 등으로 표기되었다. 또 한편 '마리아' '에스터' 등의 세례명을 그대로 쓰거나 '몌례', '애시덕' 등의 한자화된 이름을 올리던 때였다.  

여하튼 이들 가장 '수원여자' 다운 삶을 살아갔던 '이현경'과 '이선경'이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수원의 대표적인 여성 사회주의자 이현경과 수원의 순국열사 이선경이 한 자매라는 사실은 또 다른 울림을 준다. 

이선경은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30일 서울의 사립 숙명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5일 서울 학생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구속되어 3월 20일 무죄 방면되었던 전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19년 9월 1일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이미 언니 이현경이 1917년에 졸업한 학교였다.
이선경은 집안의 경제적 여유와 개명된 아버지 덕에 언니 이현경의 뒤를 이어 서울로 유학할 수 있었다. 이는 나혜석과 나지석 자매의 뒤를 잇는 일이기도 했다. 

3ㆍ1운동 이후 각성된 이 땅의 젊은이들은 독립운동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선경 역시 수원 삼일여학교 출신으로 당시 이화학당 2학년생인 임순남(임효정)과 최문순 등 또래들과 나라의 장래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선경은 임순남·최문순과 함께 박선태·이득수 등과 1920년 6월 7일 서호(西湖)에서 만나 혈복단(血復團)을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는 논의를 하였다. 이후 1920년 6월 20일 구국민단의 조직을 개편하여, 단장 박선태, 부단장 이득수, 서무부장 임순남, 재무부장 최문순, 교제부장 차인재, 이선경은 구제부장을 맡았다.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 등의 목표를 세우고 1920년 7월까지 1주일에 한번씩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에 있는 삼일학교(현 매향여고)에서 회합하여 독립신문의 배포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후일 독립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그 힘을 다하고자 준비를 하였다. 이렇게 활발하게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이선경은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선경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0년 8월 31일 학교규칙 제35조 제4항에 따라 퇴학을 당하였다. 결석일수가 22일에 달하는 무단결석에 따른 것인데, 이는 이선경이 구국민단 사건으로 8월 체포되어 구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화학당에 다녔던 최문순과 임순남이 같은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없이 졸업한 것에 비하면 총독부가 운영하는 관립 여학교였던 탓에 퇴학을 당한 것이기도 하다. 

근대 수원지역사에 있어 구국민단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원최초의 비밀결사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학생들에 의하여 주도된 비밀조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1921년 4월 12일 박선태와 이득수는 징역 2년을 언도 받았고, 이선경을 비롯한 여학생들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이에 이선경은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수원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선경은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1921년 4월 21일 오전 8시 수원면 매산리 219번지에서 사망하였다.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9일 만에 19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던 것이다.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선경_1
이선경 제적부

이선경의 순국은 구국민단 단장 박선태와 같은 마을 산루리 출신인 이선경이 그와 함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학생들을 이끌었던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산루리 출신의  김노적 등과의 관계를 이선경이 입 다물고 연결고리를 부인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간호부 양성계획과 연관된 측면이 일제에 의해 집중적으로 조사받았을 것이다. 즉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일제는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고리와 지점을 집요하게 추궁하였을 것이고, 이에 이선경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가 1920년 10월 순국하고 난 지 6개월만인 1921년 4월 21일 이선경 열사가 꽃다운 나이에 또 다시 순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관순 열사의 이름을 알고 있지만, 수원이 낳은 이선경 열사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살아왔다.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이화학당 교사 미쓰 월터 선생이 시신을 받았다는 점에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에 비해, 이선경 열사는 경기여고를 퇴학당한 상태였고,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나와 집에서 순국하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이 1945년까지 지속되었고,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물들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응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더욱이 일본유학을 했던 언니 이현경이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고,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28년 남편 안광천과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돌아오지 않아 순국한 이선경을 조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수원지역은 3.1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고통 받은 숱한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폭력적 진압 속에서 순국했던 엄혹한 역사적 사실과 이후 감옥에서 순국한 많은 사람들에 비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소녀에 대하여 널리 현창할 수 없었던 우리의 근대사가 갖는 핍진함에 있다. 

이제 뚜렷한 역사적 궤적을 보여주는 순국열사 이선경에 대하여 수원은 기억하고 그와 그 가족들의 뜨거운 조국애를 널리 현창해야 할 일이다. 수원에는 불꽃같은 여성 나혜석이 있었고, 그와 동시대를 뜨겁게 살아갔던 이현경과 이선경이라는 특출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원박물관 소식지 <물고을> 제6호(2011. 12. 3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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