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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윤수천/동화작가
2013-11-24 11:24:16최종 업데이트 : 2013-11-24 11:24:1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요즘엔 어디 가나 낙엽 천지다. 발끝에 채이는 것도 모자라서 가슴 안까지 밀고 들어온다. 바람이 부는 날이나 빗줄기가 지나간 날이면 낙엽 더미가 혁명군처럼 온 도시를 휩쓴다. 그러고 보면 나무들은 그 동안 참 많이도 참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렇게 거추장스런 겉옷을 어떻게 걸치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낙엽들이 낙하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이를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분신들을 아낌없이 떠나보내고 마침내 맨살을 드러내는 나무의 본체는 깨끗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파리 무성한 여름날의 나무도 아름답지만 저렇게 발가벗은 겨울나무도 그만 못잖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며칠 전 고향 친구가 휴대폰 문자를 보내왔다. '요즘 우리 집은 하루 종일 찾아오는 손님들로 만원을 이룬다네.' 나는 궁금한 마음에 즉시 답신을 보냈다. '손님이라니? 대체 어떤 손님인가?' 곧 문자가 날아들었다. '늦가을 손님 말일세. 아니, 인생이란 손님이라고 해야 하겠지! 자네에게도 찾아갔을 텐데...' 아, 나는 그제야 그 손님이란 게 낙엽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그 손님은 다름 아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나무는 삶의 뒷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무성했을 땐 보이지 않던 나무의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름하여 나목(裸木)이다. 

겨울나무를 바라보며_1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용창

나목, 하면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나이 마흔에 등단하여 한국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박완서의 소설 제목이 나목이었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한 화가의 어두운 삶과 고뇌를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보여준 걸작이다. 
이 소설이 더욱 유명세를 탄 것은 소설의 주인공이 고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이었다. 불우한 전후 시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뜨거운 예술혼을 보여준 이야기다. 나는 겨울이 오면 박완서 선생이 생각나고 그의 첫 장편소설 '나목'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우리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온다. 한 때의 젊음이 물러가고 황혼처럼 늙음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았구나! 아,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었구나! 나무의 형체만큼 인생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나무는 삶의 거울이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오는 겨울나무 앞에서 우리는 인생을 배운다. 어떻게 살아야 저 겨울나무처럼 걸친 것 없이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를 수업하는 것이다. 아니, 나무처럼만은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얼마 전 한 젊은 작가의 수채화전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사계의 풍경을 참으로 고운 물감으로 풀어 놓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나의 시선을 오래 붙잡은 것은 눈 쌓인 시골 풍경이었다. 백설기를 쪄놓은 듯한 들판을 배경으로 몇 채의 가옥이 서로 등을 맞댄 채 서 있고 그 옆으로 난 타원형의 길이 참 맑고 깨끗했다.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삶의 거울을 보았다. 욕심을 버리고 나면 저렇게 맑은 풍경처럼 우리에게도 찬란한 여백이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숨기지 말고/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문정희의 <겨울 사랑>전문

눈송이처럼 그리운 이에게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지니고 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세속적 욕망을 벗어던진 순백의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을 맞이한 이 땅의 나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벌거숭이 육신을 드러냈다. 더할 수 없이 깨끗하고, 더할 수 없이 성스럽기까지 한 저 겨울나무들 앞에서 우리들은 이제 수업을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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