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만나다
김재철/농학박사, 칼럼니스트
2013-06-16 12:05:20최종 업데이트 : 2013-06-16 12:05:2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천산산맥의 눈이 녹아 두 줄기 물이 만나는 곳 교하(交河).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 서편에 위치한 교하성은 기원전 1세기 전한시대에 진흙 대지를 파서 구축한 성곽도시로, 강으로 둘러싸인 절벽이 자연방벽 역할을 하고 있다. 
교하성은 기원전 108년부터 450년까지 존재한 불교를 받드는 차사전국의 수도였으며, 서기 640년, 당나라는 이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고 9세기 초반 이후 위구르 제국에 속하였다. 13세기 칭기즈칸 침입 후 훼손되었으며,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중점문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만나다_1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만나다_1

유적지에 들어서면 진흙으로 만든 대형 모형이 비바람에 헐어버린 모습이다. 동쪽과 서쪽은 주거지이고 북쪽지구는 중앙탑을 중심으로 승방, 작은 탑들이 배치된 초기 인도 양식의 2천 년 전 불교사원 구역이다. 남쪽지구에는 귀족묘지와 함께 관청유적이 있다. 성터에는 아직도 왕궁 터, 불탑, 대불사, 사리탑, 관청, 감옥과 민가 흔적, 우물이 남아있다. 

강우가 적고 건조하며 기온이 높아 흙만을 사용하여도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고 한다. 두 개의 성문 중 남문은 성을 드나드는 문이고, 동문은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오아시스로 출입하는 문이지만 지금은 흙벽돌로 막혀있다. 근래 옛 우물, 금불상 등이 발견되고 서쪽에서는 완벽한 구석기 유적도 발굴하는 등 진기한 고대 신장성의 문화전당이다. 

또한 교하는 당나라 이기(李頎)의 시 '고종군행'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낮에는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白日登山望烽火)
해질 무렵 교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네(黃昏飮馬傍交河)
진중의 순라 소리 모래바람 속에 침울하고(行人刁斗風沙暗)
공주의 비파소리에는 원한이 서려있네(公主琵琶幽怨多)

여기서 공주는 한 무제의 형 강도왕 유건의 딸 유세군이고 가지고 간 비파는 한비파이다. 당시 한 무제는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유세군을 천산산맥 북쪽 터키계 유목민족이던 오손국왕에게 정략적으로 시집보낸다. 유세군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망향의 노래 '오손공주비수가'를 부른다. 

아!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한쪽 변방이어라(吾家嫁我兮天一方)
살면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니 가슴이 아프구나(居常土思兮心內傷)
누런 고니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라(願爲黃鵠兮歸故鄕)

나는 이곳에서 유럽에 화약과 제지 기술, 나침반을 전한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장군을 만날 수 있는 꿈에 부푼다.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인 고선지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안서에 이른다. 고사계는 뛰어난 무인으로서 실크로드 서쪽 끝인 안서도호부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747년, 고선지는 토번을 제압하라는 당 현종의 칙서가 전달되자 총사령관으로 기병 1만을 이끌고 출정한다. 그리고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횡단함으로써 토번 서북단의 군사기지 연운보, 소발률국을 점령, 전대미문의 승전보를 거둔다. 황제는 서기 747년 12월 고선지를 안서사진절도사로 삼았다. 

고등학교 시절, 민영규 교수의 논문 '고선지-파미르 고원에 찍힌 한국인의 발자취'를 읽고 밤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고선지 장군의 행적을 세 차례나 답사한 오렐 스타인 보고서에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는 '고선지 장군이야 말로 일찍이 유럽이 낳은 어떠한 유능한 사령관보다도 더욱 훌륭한 전략과 통솔력의 소유자 였다'는 내용은 가슴을 뒤끓게 했고, 머릿속 장군의 원정도는 언제든지 출력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지배선 교수의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을 읽어 보니 그 역시 민영규 교수의 논문을 읽고 고선지 연구를 전공하는 사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고사계와 함께 살았을 교하성, 이곳은 고선지 장군 집무유적지로도 유명하다. 장군은 이곳에서 4차에 걸친 서역정벌에서부터 마지막 탈라스 전투까지 서역정벌 작전계획 짜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 아닌가. 어느 유허이던지 간에 장군의 눈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지난 날 그가 말 달리던 장소에 천이백 여년이 지난 지금 내가 서 있다니, 감동에 겨워 40℃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온 몸에 소름이 끼쳐온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고도호총마행에서 '안서도호 고선지 장군의 푸른 호마 이름을 날리고 홀연 장안으로 오도다. 싸움터에서는 오랫동안 당할 자 없으니 주인과 한 마음이 되어 큰 공을 이루었도다'라고 장군의 총마를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장군의 위대함을 기리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어렵사리 옛 토기파편 한 개를 수습(收拾)한다. 그 옛날 고선지 장군이 물 한잔 마시던 아니 술 한 잔 들이키던 그릇 파편일지도 모른다. 

중국은 19세기 후반 국제정세의 혼란을 틈타 신장을 침공, 아예 중국영토로 편입하였다. 지금도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위구르족이 대부분으로 중국으로부터 분리운동을 벌리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하다는 고선지장군의 체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크나 큰 희열이었다. 집에 돌아와 토기파편은 항상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 왈 <이것이 고선지 장군이 술 마시던 그릇 파편이다>

추천 0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