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어디 가나 낙엽 천지다. 발끝에 채이는 것도 모자라서 가슴 안까지 밀고 들어온다. 바람이 부는 날이나 빗줄기가 지나간 날이면 낙엽 더미가 혁명군처럼 온 도시를 휩쓴다. 그러고 보면 나무들은 그 동안 참 많이도 참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렇게 거추장스런 겉옷을 어떻게 걸치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용창 나목, 하면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나이 마흔에 등단하여 한국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박완서의 소설 제목이 나목이었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한 화가의 어두운 삶과 고뇌를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보여준 걸작이다. 이 소설이 더욱 유명세를 탄 것은 소설의 주인공이 고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이었다. 불우한 전후 시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뜨거운 예술혼을 보여준 이야기다. 나는 겨울이 오면 박완서 선생이 생각나고 그의 첫 장편소설 '나목'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우리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온다. 한 때의 젊음이 물러가고 황혼처럼 늙음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았구나! 아,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었구나! 나무의 형체만큼 인생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나무는 삶의 거울이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오는 겨울나무 앞에서 우리는 인생을 배운다. 어떻게 살아야 저 겨울나무처럼 걸친 것 없이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를 수업하는 것이다. 아니, 나무처럼만은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얼마 전 한 젊은 작가의 수채화전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사계의 풍경을 참으로 고운 물감으로 풀어 놓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나의 시선을 오래 붙잡은 것은 눈 쌓인 시골 풍경이었다. 백설기를 쪄놓은 듯한 들판을 배경으로 몇 채의 가옥이 서로 등을 맞댄 채 서 있고 그 옆으로 난 타원형의 길이 참 맑고 깨끗했다.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삶의 거울을 보았다. 욕심을 버리고 나면 저렇게 맑은 풍경처럼 우리에게도 찬란한 여백이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숨기지 말고/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문정희의 <겨울 사랑>전문 눈송이처럼 그리운 이에게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지니고 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세속적 욕망을 벗어던진 순백의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을 맞이한 이 땅의 나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벌거숭이 육신을 드러냈다. 더할 수 없이 깨끗하고, 더할 수 없이 성스럽기까지 한 저 겨울나무들 앞에서 우리들은 이제 수업을 할 차례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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