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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삼근계를 다시 받다
양훈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외래교수
2013-02-18 07:57:44최종 업데이트 : 2013-02-18 07:57:4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얼마 전 짧게 강진에 다녀왔다. 꼭 다산의 자취를 찾아가자는 일정은 아니었으나, 오늘날 다산 없는 강진은 그저 평범한 국토의 남쪽 끝자락에 불과하다. 
운 좋게도 이번 1박2일엔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최고 가이드(?)인 김준혁 교수가 동행했으니 의미와 재미가 몇 곱절은 된 듯하다. 정조와 다산 전문가인 김 교수는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단박 일행을 사로잡았다.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고, 구수한 입담에 빨려들었다가, 궁중비사에 이르러서는 빠진 배꼽을 찾기 바빴다.

김 교수는 정석대로 설명해 주었으나, 내 식대로 배운 내용을 좀 풀어보자. 유배 죄인 다산에게 글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온 열다섯 소년 황상은 요즘 말로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돌대가리입니다. 저는 앞뒤 꽉 막힌 넘입니다. 저는 미련 곰탱이입니다. 그래도 해낼 수 있을까요?" 문헌상으로는 둔할 둔(鈍), 막힐 체(滯), 어근버근할 알(戞)이다.

다산의 대답.. "세상에는 같잖은 넘들 세 부류가 있다. 첫째, 잘 외는 넘들이다.(敏) 사서삼경, 육법전서, 성경전서, 팔만대장경 척 보면 줄줄 외우는 넘들. 이런 치들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둘째, 단숨에 글 휘갈겨 쓰는 넘들이다.(銳) 논문이건, 칼럼이건 한방에 션하게 완성하는 넘들. 이런 치들이 쓴 글은 일견 호방하게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글이 들떠 날라 다닌다. 찬찬히 뜯어 읽어 봐라. 구멍투성이다.
셋째, 슬쩍 튕겨주면 다 알아채는 넘들이다.(捷) 특히 먼 훗날 후손들이 세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거들먹거리는 치들 중에는 이런 넘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얘들은 절집에 가서 새우젓을 얻어먹을지는 모르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 현묘한 이치를 거칠기 짝이 없게 이해하는 넘들이야 말로 진짜배기 찌질이들이다."

이어지는 다산의 말씀. "걱정할 것 없다. 돌대가리도 천착하면 뚫어낼 수 있다. 꽉 막힌 넘이 막혔다 뚫리면 흐름이 장대해진다. 미련 곰탱이가 꾸준히 연마하면 거칠지 않고, 빛이 반짝반짝 날 것이다. 네가 그리 되려면 부지런 하고 부지런 하고 또 부지런하기만 하면 된다." 이게 저 유명한 삼근계(三勤戒)다.

유배지 도착 다산이 처음 머물렀다는 사의재(四宜齋)에서 문득 든 의문 하나. 황상의 질문에 다산이 저리 즉답을 하였다면 이율배반 아닌가? 어린 제자의 고백을 딱 듣자마자 술술 답하는 건 스스로 경계해 마지않은 민, 예, 첩 그 자체이지 않은가?

우선 떠오르는 답 하나. 정인보 선생 표현대로 한자가 생긴 이래 최고의 학자인 다산이 평소 민, 예, 첩을 극도로 경계하고 미워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미 준비된 대답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다산 자신이 민, 예, 첩 아니었나? 비록 과거시험에 정시로 장원급제하지 못하고 특별 수시전형 차석으로 합격하기는 했지만, 다산은 성균관 시절부터 정조 임금이 주는 일등상을 싹쓸이 하는 수재 아니었던가? 
일곱 살에 벌써 "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구나. 멀고 가까운 땅이 다르기 때문이지.)"이라는 시를 지은 신동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의문은 유배지 도착 첫날 주막집 주모와 나누었다는 대화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주모는 대학자 다산에게 묻는다. "제가 진짜 궁굼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왜 조선 땅에서는 아버지 혈통만 그리 중하게 여기나요?" 
거유 다산이 뭐라 뭐라 설명했지만 주모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한다. "쇤네 생각으론 말씀입지요, 씨앗을 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 씨앗을 보듬고 싹 틔워 자라게 하고 꽃 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흙의 역할이 훨씬 크지 않나 봅니다요." 대학자는 그 얘기에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아! 백성의 지혜란 이런 것이로구나. 내가 공부 헛했구나.  

사의재 자리에 아이들 가르치는 서당을 연 해는 1802년으로 전해진다. 유배 1년 만이다. 유배 온 첫날 주모로부터 한 대 제대로 맞은 다산은 1년 동안 자신의 전 생애를 철저히 성찰했을 것이다. 
아! 이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 무리가 저 민, 예, 첩 찌질이들이로구나. 그러므로 황상에게 준 교훈은 최소한 1년 넘는 치열하고 고독한 성찰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서당 개설 역시 주모의 충고 덕이었다 한다. 
"나으리 사정이야 딱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게 많이 배우고 훌륭한 분이 이렇게 놀고먹어서야 되겠습니까? 애들이라고 가르치셔얍죠." 그 주모의 동상이 복원된 사의재 뒤뜰에 서 있다.

지난여름 강진에 갔을 때는 다산초당에 올라가 잠시 묵념 하고 곧장 월악산으로 내 빼 놀다왔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배웠다. 백련사로 가는 길, 그리고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산길 옆 입춘 앞둔 동백들이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게.

 

다산의 삼근계를 다시 받다_1
다산의 삼근계를 다시 받다_1

※뱀발-다산은 2012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의 인물이다. 전 세계가 우러르는 학자 말씀을 너무 가볍게 다루었다 꾸짖을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내 본시 천학비재인데다, 어린 황상보다 더 돌대가리고, 막혀 있고, 미련 곰탱이인 탓이다. 용서하시라. 내가 다산처럼 과골삼천(踝骨三穿), 수십 년 앉아 공부하고 글 쓰느라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날 정도로 노력할 리는 만무하나, 그래도 이번에 삼근계를 다시 받은 만큼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는 있노라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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