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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도 수원시대 반세기 실록 편찬을 제안하며
강대욱/경기도 박물관 초대관장
2010-06-14 18:57:34최종 업데이트 : 2010-06-14 18:57:34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경기도정 새 지평 수원시대 개막

1967년 이후 반세기 도정실록편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사기열전이 중국의 역사 시작을 일깨우듯 현대사의 생생한 기록, 당시 언론보도 자료, 관련도민의 현장증언, 당시 도정실무 공무원 경제인의 회고담은 경기도의 50년사 격동으로 점철된 8.15광복, 6.25한국전쟁, 4.19, 5.16혁명의 중심무대 경기도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물줄기다. 

경기도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하는 실록의 편찬은 경기도의 자긍심 표출이 될 것이다. 인터넷시대 디지털원문구축, 동영상등 도민의 생활속에 각인되는 경기도정의 50년 파노라마 이것은 뿌듯한 경기도의 실상을 반영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중국의 전한시대 가의는 국정운영 기술서인 좌씨전훈고를 저술하고 이렇게 말했다. "앞차의 바퀴자국은 뒤차에 대한 교훈이다" 
조선왕조실록 편찬과 국난에 대처한 사고의 설치로 역사기록을 보존한 문화민족의 격조 높은 자존심이 지구촌시대 문화의 실상을 대변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왕조실록의 보존은 바로 우리민족의 정신이다. 경기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이정표를 주도해온 산실, 도청의 변화와 경기산하를 살펴본 후 경기도 수원시대의 서막, 지나온 발자취의 실상, 실록을 재현해 본다. 

1. 경기도청 청사의 변천

한반도의 중심이 경기도이듯 경기도의 중심은 수원이다. 수원의 산하는 생명체 근원의 인자인 오장육부가 서리 서리 사려 앉은 여인의 태반과 같은 곳이다. 때문에 민족중흥의 이정표, 출발점이 경기도였고 한강을 가슴에 품어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이래 각축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강을 차지한자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잃은 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생명력이 경기인의 자긍심으로 고동치는 오늘이다. 동북아 국제경쟁의 교두보 역시 삼국이래 경기도의 몫이었다. 서해안 평택항의 기지개는 광복이후 65년 대장정의 길목이 경기도였음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경기도는 조선초기부터 수도의 외곽지대를 관장하다가 조선후기에도 도성을 둘러싼 환상협수체계의 거점인 개성, 광주, 강화, 수원의 수도방위체계의 근간을 이루어 동서남북 대각선의 요충이기도 했다. 때문에 경기도정을 기획 추진하는 감영(관찰사가 직무를 수행하던 관청)은 당초 삼남대로의 요지이자 4대유수부의 남부지역 관문인 수원에 개설하였다가 다시 동쪽 요충인 광주로 옮기기도 했었다. 

그후 서울의 돈의문밖에 설치한 적도 있었고 1618년(광해군 10)에는 현재의 가평지역인 영평과 포천 두현을 합쳐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그곳에 경기감영 신영을 개설하기도 했으나 인조반정으로 혁파되었다가 병자호란으로 신영이 소실되자 경기감영은 한때 도성의 서북쪽에 있었던 사첨감에 있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현재의 서울시 서대문밖에 경기감영이 설치되어 1896년 수원으로 감영이 옮길 때까지 관찰사의 업무소관인 행정, 군정, 사법, 경찰권을 행사해 속칭 포정사로도 불렸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하여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서울 광화문 앞으로 이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때 부산에 피난하였다가 수복환도 당시 잠시 수원의 화성군청을 도청의 임시 청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2. 경기도정 새지평, 수원시대 도청 이전식

'경기도청 이전식, 축제무드 수원시' '백일장, 불꽃놀이등 다채로운 기념행사' '70여장의 현수막 펄럭이고' 제하의 기사로 1967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의 이전식 보도내용이다.  

<수원>경기도청 이전식 및 환영시민대회가 23일 오전 10시부터 새청사(고등동 산1)앞 광장서 수원개시이래 처음보는 인파가 모인 가운데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정일권 국무총리, 이석제 총무처장관을 비롯한 3부요인과 박태원 지사, 도내시장, 군수 및 남녀학생들도 참석한 가운데 공군밴드 주악으로 시작된 이전 및 환영시민대회는 국민의례에 이어 경과보고와 박지사의 식사가 있은 다음 남영우 수원시장의 환영사의 순으로 진행됐는데 경축무드에 휩싸인 수원시 주요거리에는 70여장의 현수막이 펄럭였고 화려한 아치의 환영탑, 경축탑 등이 더욱 축제무드를 돋우었다. 
이날 수원시내에서는 기념행사로 ①한글·한시 백일장 ②경축비행 ③씨름, 느네대회 ④불꽃놀이 ⑤도지사기 쟁탈 축구대회 ⑥환영의 밤 등이 벌어졌다. 

-3만 여명이 운집한 도청광장, 이전식장의 내빈 정일권 국무총리, 박태원 도지사, 남영우 수원시장, 이병희 국회의원이 사진이 클로즈업 된다. 이어서 1964년 10월 15일 수원도청건립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동영상이 잠시 화면을 비친후 당시 도지사 박태원 지사의 사진과 도정수행사진이 경기도 자료관 전시자료에 의해 동영상으로 펼쳐진다.

3. 도청수원 이전비화

1) 1953. 4. 15 최초로 인천으로 이전 주장이 제기된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장이던 김정열을 정부가 피난중인 부산으로 보내 당국에 진정서를 낸 것이 시초였다.
 2) 인천에서 도청 이전 로비활동이 강화되자 수원시 수원시장을 필두로 지역유지들이 4월 21일 모임을 갖고 <경기도청 수원존치> 위원회를 구성하고 도청이 수원에 유치가 아니라 존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1953. 5. 17 당시 도지사였던 김영기 지사 담화발표 <도청은 서울로 갈 것이다> 도지사 담화문 발표는 수원, 인천 여론을 악화시켰고 도민이익에 배치되는 처사임을 제기했으나  부산에 있던 정부가 서울로 돌아옴에 따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옛 본가 건물로 옮겨졌다.
4) 1956. 5. 26 최헌길 5대도지사 취임후 도청이전문제 재연, 인천,수원간 유치운동이 첨예화 되었다.
5) 1953 이후 계속되었던 도청유치논란은 매듭을 짓지 못한 채 1961.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나 군정시대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6) 1962. 8. 10 수원의 유지 김구배가 단독으로 건의서를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에게 제출, 민간 차원으로 유치전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7) 1963. 1. 12차 격문발송, 요지는 당시 박창원 도지사가 최고회의 박의장에게 경기도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할 것을 진언한데 대한 지리, 교통, 역사적 연고로 보아 수원으로 복귀하는 것이 당연지사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8) 1963. 7. 30 경기도청 수원유치위원회 조직 당시 수원의 국회의원 출마예상자인 이병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9) 1963. 12. 10 경기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는 법률안 통과로 수원시는 환호의 물결로 인천시는 항의 궐기대회가 열렸다.
10) 1964. 10. 15 수원시 고등동 팔달산 밑 수원공설운동장터에서 성대한 경기도 청사 신축기공식 거행,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 국회의장, 삼부요인, 15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운집성황을 이룬 기공식 모습이 중앙일간지에 보도되었다. 

5. 경기도청 수원시대 반세기 도정실록

이 분야는 분야별로 자료수집과 관련 공무원의 녹취록 및 증언등을 동영상으로 처리하되 자료의 뒷받침이 요구되는 대본이다. 
  1) 문화적 측면 - 화성복원주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경기도 수부도시 수원의 문화자긍심 선양
  2) 경제적 측면 - 삼성전자, 선경합섬, 한일합섬 수원 유치로 경제발전 구심역할 수행 경기발전의 동인 구현
  3) 사회적 측면 - 경부 영동고속도로 분기점, 교통 환경 개선
  4) 21세기 인터넷 문화시대 경기문화 원형상실 정착 - 경기도 박물관 개관, 경기문화재단 창설 들을 대상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 건설분야, 산림분야, 농림분야, 보건분야 등등 경기도정의 산실 수원의 파노라마가 기대되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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