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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용 장군 병자호란 전승지 광교산 호항곡
강대욱/경기도 박물관 초대관장
2010-08-26 11:33:57최종 업데이트 : 2010-08-26 11:33:5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의 산하는 하늘이 정해준 천혜의 낙토다. 
국토의 척추 백두대간 한남정맥 주봉으로서도 그러하고 18세기 후반 실학군주에 의한 농경문화의 터전으로 이용후생 민생안정에 국정의 지상과제가 되었던 근,현대사 국운융성의 맥박이 고동치는 곳이라는 데에서도 그러하다. 

뿐만아니라 병자호란때 북방민족의 총수를 자랑하는 청태종의 사위와 3대장을 격살한 광교산을 진산으로 민족혼이 용솟음치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문화유적은 한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를 대변하는 곳이다. 후손에게 주는 정신, 역사의 현장이다.

임진왜란이 일본족의 무자비한 유린으로 국토의 산하가 황폐에 이른 뼈아픈 참변이었다면 병자호란은 만주족의 사나운 총검 밑에 무릎을 꾼 통분의 악몽이었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9년만인 1636년(인조 14)의 일이다.

참담을 극했던 임진, 병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북방민족의 말발굽에 짖밟혔야 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저 하늘의 성좌 마냥 우뚝햇던 김준용(金俊龍)장군, 기세등등한 청군의 기병을 광교산 호항곡(종루봉, 장군봉,비로봉으로 호칭)에서 대파, 저들의 처절한 곡성이 울렸던 1637년(인조 15)초 인조와 조정대신이 남한산성에서 저항을 시도할 때이다.

역사는 명분론(강경파)와 실리론(온건파)의 양바퀴를 축으로 굴러가는 수레와 같은 것. 
유비무환의 항전태세도 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당해야 했던 창황망조 바로 그것이었다. 1636년(병자년) 12월 강화도로 피난을 서두르는 조정의 혼란. 맨발로 피난하는 남부여대의 성중 백성들의 곡성이 하늘에 사무친 참담함속에 적의 선봉이 이미 양천강(김포)를 차단하여 강화행을 포기,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난을 서둘러야 했던 인조와 조정대신...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 정월에는 청태종이 도착하여 전군을 지휘하니 산성은 완전히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전국의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진군, 위기에 처한 군왕을 돕고자 했으나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당하는 불운속에 45일 동한 고립무원의 항전을 전개했던 남한산성의 농성은 만성호곡(滿城號哭:성안 가득찬 통곡소리)속에 송파나루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단군 국조이래 처음있는 민족의 치욕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란의 와중에서도 김준용 장군은 남한산성 항전기간에 호남절도사로서 친병을 이끌고 군, 현의 병사를 모집,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켜 북상하니 군사의 움직임에도 법도가 있었다. 13일 만에 수원에 도착, 광교산에 진을 친 청군과 일대 접전을 벌인다.

광교산은 백두대간 한남정맥의 주봉으로 남한산성과 지호 지척에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러한 지리 때문에 남한산성을 구하려면 반드시 이곳에 포진한 청군을 대파해야만 했다. 
남한산성으로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청군의 대장도 이름없는 대장이 아니었다. 청태종의 신임으로 그 사위가 된 양고리[揚古利, 혹은 백양고라(白羊高羅)라는 기록도 있음]였으니 김준용 장군의 광교산 전투는 양웅(兩雄)이 대치한 절박한 결전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전황은 이쯤에서 생략하고 아무튼 일발백중으로 퍼붇는 근왕병의 공격과 포격에 적장 이하 수백명이 떼죽음이 되어 베개를 베듯이 깔려죽는 대승을 거둔다. 
실로 청태종의 13만대군이 무인지경으로 우리국토를 유린한 후 처음으로 거둔 쾌승이었다. 청군이 계곡에 겹겹이 쌓인 그들의 시체를 태우며 처절한 곡성을 터트렸던 곳이 광교산 호항곡(胡降谷)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발전은 '도전과 응전 Challenge and Response'이라고 했다. 
호항곡 충양공 김준용 장군의 전승지 암벽에는 그날의 전승을 기록한 '충양공 김준용 전승지-병자호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忠襄公 金俊龍 戰勝地-丙子胡亂 公提湖南兵 勤王至此 殺淸三大將'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병자호란 때 공이 호남의 친병을 이끌고 근왕코자 이곳에 이르러 청군의 대장 3명을 죽였다는 전승비문이다.

김준용 장군 병자호란 전승지 광교산 호항곡_1
김준용장군 전승지


이 전승비문은 18세기 후반 수원에 화성 축성을 총 지휘하던 채제공 선생의 명으로 현장의 바위에 각자했으니 명재상 채제공선생의 혜안은 '미래를 중시하는 민족은 발전하고 번영한다. 역사란 미래에 대한 전망을 투사하는 스크린이며, 현실은 그것에 적합한 소재를 뽑아내는 보물상자와 같다'는 말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는 수원의 상징, 광교산의 정신일 것이다.

경기남부 일원의 뜻있는 등산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김준용 장군 전승지 일원의 환경정화와 현장학습을 체감하는 실전상황을 천연색 그림으로 표현한 종합안내도, 수원의 역사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쉬어가는 의자 몇개 설치는 오늘을 사는 수원시민의 사명이자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의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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