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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의 친일 행위
김우영/수원시 인터넷신문 주간
2010-11-11 16:49:49최종 업데이트 : 2010-11-11 16:49:4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우리민족의 고유의 정서를 시로 녹여낸 걸출한 시인 서정주는 우리문단의 보물같은 존재였다. 
그런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그에게는 죽어서도 벗지 못한 민족적 죄업이 하나 있었다. 바로 친일문제였다. 

그는 일제시기 윤동주나 이육사 같은 시인들이 목숨을 내걸고 저항했던 것과는 달리 쉽게 친일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시인이면서도 1943년 '조광'에 발표했던  '최체부의 군속지망'이란 소설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한 우직하고 성실한 우체부 최씨'가 '황국신민' 으로서 끓어오르는 애국심으로 거듭 군속을 지망해 결국엔 '영광스럽게' 전쟁터에 나간다는 내용으로 전쟁참여의식을 억지로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화성시(당시 수원군)출신의 뛰어난 음악가 홍난파도 친일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친일문제가 불거지기 전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운을 음악으로 표현한 음악가, 민족 예술가로서 수절을 지킨 인물로 소개됐다. 

특히 그가 작곡한 '봉선화'같은 음악은 일제 치하 아래에 있는 조국의 비운을 상징한다고 학교에서 가르쳤다. 실제로 '봉선화'는 일제에 의해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홍난파는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친일가요와 글을 계속하여 발표했다. 친일가요 '희망의 아침'이나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 '지나사변과 음악'은 그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이다. 

어떤 이들은 '당신도 혹독한 일제시기에 살았다면 그랬을 것'이라며 친일파들을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친일인사들은 당시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들이다. 민족과 국가의 사표가 되었어야 할 인물들이다. 백성들이 일제의 강요에 버티지 못해 친일의 길로 들어서도 이를 준엄하게 야단쳐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민초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거나 무장투쟁라는 극한의 방법을 택했고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따라서 민족지도자들의 변절이 지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홍난파의 친일문제는 지금까지 논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홍난파는 앞으로 발간되는 친일인사 명부에 이름이 등재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대통령 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시킬 계획이었으나 후손들이 효력정지 신청을 내 일시 중지됐다가 결국 소송을 취하하면서 친일명부에 올리게 된 것이다. 

민족과 국가를 배반한 대가는 사후라도 반드시 치러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의 정의가 바로 선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친일행적과 예술적 성취는 분리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음악까지 묻어버리는 것은 아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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