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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그해 3월 수원에는 수 천 명의 '김세환'이 있었다
언론인 김우영
2020-03-02 14:07:48최종 업데이트 : 2020-03-02 14:09:01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그해 3월 수원에는 수 천 명의 '김세환'이 있었다

[공감칼럼] 그해 3월 수원에는 수 천 명의 '김세환'이 있었다


그해 3월에도 수원천에 피었을 봄까치꽃. 사진/김우영

그해 3월에도 수원천에 피었을 봄까치꽃. 사진/김우영

 
봄이다. 다시 3월이 왔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확산돼 우리나라가 큰 어려움을 겪고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는 터라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양지에서는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피워냈고 맑은 향을 자랑하는 매화와 목련이 꽃 몽우리를 맺었다. 화홍문 밖 수원천변엔 작고 앙증맞은 봄까치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100여 년 전 그때도 추위를 뚫고 이렇게 피어 있었을 것이다. '100여 년 전 그때'인 1919년 3월 1일 저녁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용두각) 일대에서는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를 포함해 수백 명이 횃불을 들고 모였다. 이어 봉수대, 팔달산 화성장대 등 20여 곳에서 만세 함성과 횃불이 타올랐다.

이 만세시위는 수원군(현 수원시, 화성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주지하다시피 수원군 일대의 만세 항쟁은 전국에서도 가장 격렬했다고 평가된다.

이 만세항쟁의 배후에 김세환 선생이 있었다. 원래 김세환 선생은 삼일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원시내를 거쳐 화성학원까지 가는 만세시위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경찰이 거사를 눈치 채자 시간을 늦춰 저녁 횃불시위로 대체된 것이다.

일제의 거듭된 강경진압으로 만세시위는 잦아들 수밖에 없었으나 독립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지하로 숨어들거나 만주와 미국 등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구국민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다 투옥돼 모진 고문으로 숨진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애국장)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끈 의로운 기생 김향화(대통령표창) ▲조선총독 우가키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조안득(애국장) ▲구국의 일념으로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차인재(애족장)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가이자 독립운동가 임면수(애족장) ▲차별 없는 세상과 독립을 꿈꾸며 수원예술호연구락부 활동을 했던 홍종철(애족장) 선생 등이 역사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다.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생명과학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사회주의 청년들은 수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뿐만 아니라 소작농들도 소작쟁의를 통해 식민지배에 저항했으며, 노동자들도 쟁의에 나섰다. 수원의 지식인들과 민초들의 항거는 해방이 될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출옥 후 가족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독립기념관 소장

출옥 후 가족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독립기념관 소장

김세환 선생은 수원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에 양으로 음으로 연결돼 있었다.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라 수원을 기반으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교육에 헌신한 선구자였다. 수원 지역 뿐 아니라 이천, 충남지역 등 국내 3·1 독립만세 운동을 사전에 조직하고 준비한 민족 대표 48인 중의 한사람이었다.

선생은 1889년 11월 18일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242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92)에서 출생했다. 한성외국어학교와 일본 중앙대학에서 공부한 뒤 수원으로 돌아와 수원상업강습소(지금의 수원중·고등학교)와 삼일여학교(지금의 매향중·고등학교)에 재직하며 학생듩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줬다.

3·1운동 때는 수원 인근과 충청지역의 동지 규합에 힘쓰는 한편으로 수원군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선생은 경성에서 진행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됐고 360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재판장이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속 운동할 것인가?"하고 물었을 때,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1920년 7월20일 민족대표 48인의 얼굴이 실린 동아일보. 맨 마지막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세환 선생.

1920년 7월20일 민족대표 48인의 얼굴이 실린 동아일보. 맨 마지막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세환 선생.

석방된 이후에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연합조직이었던 신간회(新幹會) 수원지회장과 수원체육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동을 쉬지 않았다. 선생은 광복을 맞은 지 한 달 후인 1945년 9월 16일 세상을 떠나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며 1963년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동안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는데 지난해 3·1운동 100주년에 비로소 집중 조명됐다. 김세환 선생 집터에 있는 가빈갤러리 조성진 대표(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이사)는 자비를 들여 김세환 선생 집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3·1운동 101주년을 맞는 올해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수원의 독립운동가 중 최초다.

앞으로 임면수 김향화 이선경 등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애국지사들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길 바란다.

수원천에 가득 핀 봄까치꽃을 보면서 수많은 민초들의 독립항쟁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 때 살았다면 나도 그분들처럼 나를 내던질 수 있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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