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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칼럼]화성문화제와 의왕(醫王) 정조대왕
정 국 영 / 한의사
2009-10-14 17:11:12최종 업데이트 : 2009-10-14 17:11:1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화성문화축제를 돌아보면서 정조대왕이 우리에게 많이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조대왕의 위상을 평가한다면 어디다 비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우선 조선 전기 조선의 국가적 기틀을 바로잡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조선을 부흥시킨 왕을 꼽으라면 세종대왕을 꼽을 것이다. 반면 조선 후기 조선을 부흥시킨 왕을 꼽으라면 정조대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수원시민입장에서). 

[한의학칼럼]화성문화제와 의왕(醫王) 정조대왕_1
[한의학칼럼]화성문화제와 의왕(醫王) 정조대왕_1
세종대왕을 이야기할 때 흔히 그가 남긴 훈민정음 서문을 통해 세종대왕의 인간적인 면과 한글 창제의 의미와 목적을 살펴보듯이 정조대왕을 이야기할 때도 정조가 친찬한 의서 수민묘전의 서문을 통해서 정조대왕의 인간적인 면과 의서 친찬의 목적, 의왕의 면모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의학이라는 것은 모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므로 부모를 섬기는 자라면 마땅히 의학을 알아야만 한다. 의학이 어찌 천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동방의 풍속이 방술에 종사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며 부끄러워하나 그것이 유학을 숭상하는 자의 소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의학도 또한 유술의 일단이라 할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의서를 공부하여 영조 42년부터 영조 52년까지 선대왕의 환후를 직접 보살피기 위해 허리띠를 풀지 않고 10년 동안 맥과 약초에 대하여 공부를 한바 있다. 사람의 품부가 옛날과 지금이 다르고 동서의 풍기가 같지 않다. 고금의 의서 중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합한 것은 오직 양평군 허준의 동의보감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이론과 처방이 서로 혼잡 되어서 그 체제가 자뭇 정리된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내가 그것을 정리하고 요점만을 취하였다. 또 탕액, 각 처방은 별도로 속편으로 삼았으니 이것을 '수민묘전'이라 이름 지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왕들이 백성들을 위하여 또는 왕족을 위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의서를 편찬하도록 지시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직접 의서를 공부하고 친찬한 경우는 많지 않다. 역사적으로 조선 세조가 의학론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조처럼 할아버지 영조의 환후를 10여 년간 돌보면서 직접 의학에 몰두하여 의서를 써낸 경우는 없다고 봐야한다. 
더욱이 수민묘전의 서두에 찍혀있는 동궁의 직인으로 봐서 이 책은 세자 시절에 기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민묘전의 서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정조대왕은 영조의 간병을 위하여 의학을 공부했고 영조의 앉고 눕히고 하는 모든 기거를 몸소 다 직접 행하였으며, 영조가 왕세자의 고달픔을 걱정하여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끔 하였다가도 왕세손만큼 하지 못한다 하여 금방 짜증을 내었다고 한다(천릉지문 - 심상규). 
또한 10년 동안 허리띠를 풀지 않고 잠자리에 든 것은 유명한 정조의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정조의 의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은 수민묘전에서 찾을 수 있고 정조가 저술을 명한 제중신편을 통해서 기존 의학과 다른 뚜렷한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보다 실용적 의학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 전의 의학서적들이 번잡하고 정리가 일목요연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핵심만을 취하여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런 의학적 관점은 수민묘전 서문에서도 드러나 있고 강명길이 저술한 제중신편에도 다시 한번 나타난다. 제중신편의 범례에는 기존 의서들의 번잡함을 없애고 핵심적인 것만을 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는 다른 시대 의학서적과는 달리 노인병과 노인의 건강유지 양생법을 특별히 강조하고 증보하였다. 이것은 어린 시절 정조가 가진 효에 대한 가치관이 의서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를 '의왕(醫王) '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어린 세자 시절부터 의학에 정진하여 직접 의서를 친찬하였다는 사실 외에 그가 자신의 의학관을 담은 의서를 만들도록 지시한 제중신편의 교정과 수정에 직접 관여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궁중 내의원들과 자신의 탕액과 치료법에 대해서 논쟁을 하거나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등 높은 의학적 식견을 가졌다는 점, 그리고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실용적 의학을 갖추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화성문화축제를 보면서 정조대왕이 가졌던 주체적이고 실용적이면서 효에서 발로한 유작 수민묘전 서문을 통해 정조가 조선시대 의왕으로써 불리는 것이 전혀 손색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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