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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남을 배려하는 마음, 멸치의 의미
김광기/시인, 아주대 강사
2008-12-23 08:54:06최종 업데이트 : 2008-12-23 08:54:0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칼럼]남을 배려하는 마음, 멸치의 의미_1
[칼럼]남을 배려하는 마음, 멸치의 의미_1
한 해가 다시 오는 시기이다. 
이 시기만 되면 깊이 생각게 하는 사자성어 몇 개가 있다. 그것은 근하신년(謹賀新年)의 이면에 있는 송구영신(送舊迎新)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자는 이 말뜻에는 '보내는 옛것'과 '새로 맞이하는 새것'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싸안고 있는 의미가 있다. 
옛것과 새것이 어떤 기준으로 단절 혹은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 없이 오고 가는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어찌 오늘이 간다고 어제가 잊혀지고 내일의 의미 속에 오늘의 의미가 희석되기만 할 것인가.

사람의 일은 어느 시기나 어떤 시점에서도 단절되는 의미가 아니라 상호 소통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시간과 시간이 연결되는 요즘의 의미망 속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한번 쯤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 누가 누구를 배려한다고 하면 우리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도량이 넓은 사람이 도량이 좀 작은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다.

저녁밥을 먹으며 국그릇에 있는 통 멸치 몇 마리를 건져내다가 멸치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한 일이 있었다. 국물을 우려내고 아무런 맛도 없을 것 같은 멸치, 제 몸을 온전하게 유지하고는 있지만 토막이라는 말로 불려도 괜찮을 만한 멸치, 멸치 몇 개를 건져내놓고 보니 국물에서 이미 멸치의 존재의미는 없어지고 말았다. 
하물며 산산이 부서진 고춧가루도 작은 알갱이로나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국물만 남긴 멸치의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멸치가 들어가야 국 맛이 나는 음식에서 멸치가 없이 우리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멸치가 제 몸을 우리고 간 음식을 우리는 멸칫국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 그날 내가 먹은 국도 김칫국이었다.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던 '멸치'의 이름은 '멸어(蔑魚)'라는 명칭을 오늘날까지 이은 듯하다. '멸(滅)하다' '업신여기다'라는 주요 의미를 가진 '멸'과 왠지 어릴 것만 같은 외양을 어림잡은 '치(稚)'의 의미가 합성된 말이 아닌가 싶다. 버젓하게 생선이란 그룹에도 끼지 못하는 아주 하찮은 의미로 불려진 이름이다. 또 '멸'하고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생선이라는 뜻에서 불려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멸치가 생색도 나지 않게 국물 맛을 주는 것을 '배려'라는 의미와 상통시킨다면 지나친 억지가 될까? 적어도 그렇지는 않으리라 본다. 남을 도와주거나 배려해준다고 하면 생색부터 내고 싶은 게 우리네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상대를 진정으로 배려해주는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사라지는 멸치의 존재처럼 자의로 그런 성심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멸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자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생에서 모든 것을 다 주고 자신의 생이 다하고 나면 자신의 몸뚱이조차 가루로 내서 치어들의 먹이까지 되고자하는 그런 삶도 있다. 그런 숭고한 삶을 본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어떤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시국에 내가 무슨 정신으로 남을 도울 수 있을까, 남을 배려할 수 있을까 하며 여유까지 잃지 말자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돕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쓰고 남아서 남을 돕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사람이 풍요로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 풍요로운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며 반대로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불행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욕구는 다양하게 분출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이 세상을 살 수는 없다. 누구든 부족한 것은 있게 마련이며 누구든 다른 사람의 이러한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라고 자책하기보다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최소한 우리는 스스로 불행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이 당시에 자살한 어떤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는 말이 생각난다. '죽을 정도로 힘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어차피 죽을 몸, 다른 사람의 손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에서 얼마간이라도 봉사할 생각은 없었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손이 필요한 사회복지시설 같은 곳에서 몇 년 아니 몇 달만이라도 봉사를 해보았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방법을 택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힘든 시기라고 한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을까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사는 것은 어떨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돕는 일은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다. 

김광기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곱사춤,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저서-논리 중심의 전략적 글쓰기, 논술 등. 
수원예술대상(문학부문, 98년) 수상. 
AJ 대표 
아주대 등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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