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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리운 뒤란
정수자/시인·문학박사
2009-08-28 12:47:10최종 업데이트 : 2009-08-28 12:47:1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유독 마음 가는 곳이 있다. 뒤란이 그러하다. 백남준 아트센터도 마음을 오래 잡아 앉히는 뒤란을 갖고 있다. 뒤태까지 고려한 건물이 흔치 않아 더 귀하게 음미했었다. 돌담길과 뒤란의 창의적 변용 같은 구부러짐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삼삼하게 감겨든다.

대부분 뒤란은 동양화 여백 같은 텅 빈 충만을 지니고 있다. 좋은 시의 행간이 그러하듯 말이다. 우리 시골집 뒤란 역시 뽑아도 뽑아도 자라는 잡풀처럼 출구 없는 고뇌들을 받아 기르고 있었다. 이상한 충동으로 우물을 기웃거린 시절의 자화상도 다 기록하고 있었다. 먹구렁이처럼 그늘을 틀고 앉은 뒤란, 거기서 청춘의 그늘은 자주 축축했다.

뒤란에는 그늘만 아니라 꽃도 많았다.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 과꽃 같은 소박한 우리 꽃들과 몰래 키워 더 고혹적인 귀기 어린 양귀비까지 꽃들이 늘 피고 졌다. 여름밤이면 수제비며 칼국수며 옥수수도 별빛을 받고 있었다. 반딧불이가 멀리 가버렸듯, 그런 시간은 이제 여기 없다. 하지만 몰래 받아놓은 눈물들이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절에 가도 뒤란을 돌아보는 버릇이 있다. 뒤란은 어디든 삶의 뒤치다꺼리들이 되는 대로 쌓여있기 일쑤다. 그런 속에서 굴뚝에 서려 있는 누군가의 한숨을 엿듣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눈물처럼 고여 있는 지난날의 낙수 자국들을 슬며시 메워줄 때도 있다. 누군가도 그랬지 싶게, 스르르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도 한다. 그리고는 뒤가 늘 켕겨서 뒤란의 말을 한참씩 듣는다며 일행에게로 돌아오곤 한다. 

그때 다른 사람들도 내 안의 뒤란을 조금 엿보는 느낌일까. 그늘 한 채 내려놓는 순간을 잠깐 훔쳐보기도 할까. 그래서 누군가 뒤란을 두리번거리면 언니가 개짐을 들고 들어갈 때처럼 가만히 기다려줘야 한다. 어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빌 때처럼 손을 같이 모으며 바람의 독경을 들어야 한다. 출렁거리는 달빛에 온몸이 푸르게 젖어도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뒤란에는 그런저런 시간이 지층처럼 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뒤란에 갈 필요가 있다. 가끔씩 혼자 우는 게 우리네 삶일진대, 생의 묵은 갈피들을 내려놓을 으슥한 곳간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받아 안아줄 웅숭깊은 그늘도 있어야 한다. 다락이나 뒤란 같은 어수룩한 곳이 다 사라지고 너무 빤한 공간에서 살다 보니 그런 터수들이 점점 더 절실하다. 

누구나 지녔음직한 마음 곳간. 뒤란은 외롭고 지칠 때 찾는 영혼의 집 같다. 자신을 비우고 정화하는 마음의 성소 같다. 그러고 보니 뒤란에서처럼 편하게 울어본 곳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고층에서 보는 건물의 뒤태는 뒤란이 없거나 눈길을 돌리게 하는 것들뿐이다. 우리 건물들이 뒤란의 여유를 키울 때, 고단한 생의 길목마다 마음의 오솔길도 놓일 것이다. 

요즘 뒤란이 자주 그립다. 어머니와 세 분의 어른을 보내드릴 때마다 커진 상실감 때문일까. 어느 으늑한 뒤란에 가서 흠씬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영혼의 뒤안길 같은 시도 혹여 터지려나. 어느 시의 뒤란에서 소리 죽여 우는 영혼과 먼먼 얘기도 혹여 나누려나. 이렇듯 대책 없는 감상도 슬픔도 아픔도 허여할 테니, 뒤란이 더 많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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