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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시대, 주는 만큼 받는다
김광기/시인,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사무총장
2009-03-03 09:26:33최종 업데이트 : 2009-03-03 09:26:3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불신시대, 주는 만큼 받는다_1
불신시대, 주는 만큼 받는다_1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믿지 못하며 살고 있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끼리 인사를 나누지 않는 것도 오래되었다. 이웃사람이 혹여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서로 경계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오랜 친구사이라 하더라도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죽마고우라 하더라도 현실적인 이해가 엇갈리거나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거리만큼의 경계심이나 불신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사회적인 또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우리 조상들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정신을 그 시대의 덕목으로 중시해왔던 것만 보아도 그러한 상황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오늘 날에도 생활철학으로 중요시하게 여기는 유가(儒家)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총괄적인 중심덕목 자체가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인(仁)은 '어진 마음'을 뜻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통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박애(博愛)나 인정(人情)으로 통하는 '사랑'이라 말 할 수 있다. 의(義)는 사회적인 인(仁)으로 정의(正義)를 뜻하고, 예(禮)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추구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으며, 지(智)는 선악을 판단하고 실천하는 지혜라 할 수 있다. 애초의 공맹시대에는 이러한 네 가지의 덕목이 중시되어 '인의예지(仁義禮智)'만이 강조되었다. 
이의 바탕에는 '인(仁)의 정신'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당연히 '믿음(信)'이 있기에 신(信)을 표면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음'을 자주 망각하면서 그 본뜻을 헤아리지 못해 후대에서 신(信)의 덕목을 추가하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오상으로 하여 서울에 4대문(동;흥인문, 서;돈의문, 남;숭례문, 북;홍지문)을 설치하고 그 중심에 보신각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고이래로 우리의 시대정신은 믿음과는 거리가 먼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정부는 정부 내에서 부처간의 불신이 팽배하고 국회는 국회 내의 정당 간에서 불신이 팽배하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서로를 이해(理解)하기보다는 서로 간에 발생하는 이해(利害)를 먼저 따져서 상대가 나에게 이로우면 친구가 되고 상대가 나에게 해로우면 적이 되는 상황이다. 또한 이런 것들은 무리를 지어 집단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을 만들게 되며 불신(不信)은 당연시되어 전략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은 또 하나의 명분을 만드는 배후가 되기도 한다. 서로가 합의를 해놓고도 이를 어기거나, 공약을 해놓고도 이를 어기면서 상대 혹은 정적이 먼저 신뢰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배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집단이기주의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고 구성원 하나하나가 이기주의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합의인식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는 5:5방식의 합의나 배분방식이 공평하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똑같이 나누고 보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리적인 면도 있겠지만 똑같이 나누었을 때 조금도 진보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자신의 집단이 조금이라도 더 가져야만 진보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역할에 자신이 서야만 자신의 역할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더 첨예하게 이러한 논리가 적용되고 있는지 모른다. 흔히 대인관계에서 암수의 고단수로 포커페이스라는 것을 말하곤 한다. 상대에게 품은 마음, 혹은 내가 스스로 이해를 따진 마음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마음을 품으며 상대가 나에게 이롭기만을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상대를 제압하려는 예기가 치열해지며 이해를 따지는 범주는 불신이 아니라 전략이라는 말로 대치되고 있다. 

절대 곧이곧대로 상대를 믿어서는 안 되는 전략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고단수는 '믿음'의 전략이 아닐까 한다. 상대를 불신하게 되면 상대 또한 나를 불신하게 되고, 상대를 신뢰하게 되면 상대도 곧 나를 신뢰한다.
믿음의 바탕에는 양보, 즉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먼저 하게 하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먼저 갖게 하는 마음이다. 어떤 일에 내가 먼저 상대를 이롭게 했을 때, 다음에는 상대가 나를 이롭게 한다. 주는 만큼 상대에게서 받는 법이다. 내가 주는 만큼 상대에게 받으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상하게도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면, 그 보답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받는 일이 있다. 살다보면 그러한 이치는 거듭거듭 반복되면서 돌고 돌게 된다. 그렇게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또 받기도 하면서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김광기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수료.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곱사춤',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저서 '논리, 논술' 등. 
-수원예술대상(문학부문, 98년) 수상. 
-AJ 대표,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사무총장, 아주대 등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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