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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전생에 공심돈을 만들었던 김대노미(金大老味)가 아니었을까?
김우영 언론인
2023-06-16 13:52:55최종 업데이트 : 2023-06-16 13:52:09 작성자 :   e수원뉴스

전생에 공심돈을 만들었던 김대노미가 아니었을까?
 

<사진>서북공심돈과 화서문(사진/김우영)

<사진>서북공심돈과 화서문(사진/김우영)

 

화성연구회에서 문자가 왔다. 오늘 오후 4시에 수원화성 모니터링이 있고 7시엔 수원화성 바로 알기 강좌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거듭된 술자리로 인해 잊고 있었다.

 

오늘 모니터링은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북서포루이고 수원화성 바로알기 강좌는 정수자 시인의 '문학으로 만나는 수원화성'이다. 모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행사다.

 

수원화성 바로알기 강좌는 나의 오랜 '여자 사람 친구'인 정수자 박사가 꼼꼼한 연구를 통해 정리한 내용이다. 수원에서 함께 시를 쓰는 입장에서 함께 해야 하는 강좌다.

 

모니터링도 중요하다. 화성사업소의 협조로 서북공심돈과 북서포루를 개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곳이다. 이때가 아니면 안에 들어갈 기회가 드물다.

 

북서포루는 수원화성 북서쪽, 그러니까 장안공원 중간쯤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있는 포루(砲樓)다. 벽돌을 쌓아 만든 수원화성 5곳의 포루 가운데 가장 높게 지어졌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쏘도록 만들어진 치성(雉城)의 발전된 형태다. 수원화성에는 포루(砲樓)와 포루(鋪樓)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포루(砲樓)는 전쟁에서 사용하는 공격용 무기인 포를 쏠 수 있는 곳이다.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지은 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북서포루는 3층 구조인데 아래 2개 층에서는 화포나 총을 쏘고, 3층 누각에서는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한다.

 

보물 1710호 서북공심돈은 보물 403호 화서문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화홍문, 방화수류정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화성의 시설물이다. 화서문과 어우러진 서북공심돈의 모습, 특히 야경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공심돈(空心墩)은 말 그대로 속이 비어있는 돈대다. 돈대는 본래는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이란 뜻이지만 그 위에 적군을 감시하고 대포를 쏘기 위해 설치된 군사 시설물인 보루라고 보면 된다.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벽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도록 설계됐다.

 

<사진> 서북공심돈 내부 (사진/김우영)

<사진> 서북공심돈 내부 (사진/김우영)

정조대왕도 서북공심돈을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했을 때 서북공심돈 앞에서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공심돈 공사를 지휘한 이는 도청(都廳) 이유경이다.

 

이유경은 대표적인 수원의 무관 가문 출신으로 1774년 무과에 급제하여 중요 군직에 등용되었다.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을 위한 관청으로 화성성역소를 설치하였고, 공사 최고책임자인 총리대신 채제공과 현장 총괄책임자인 감동당상 조심태에 이어 도청 직에 이유경을 임명해 현장에서 실무 전반을 맡도록 했다.

 

1791년 종2품 금위 중군으로 한강에 배다리인 주교(舟橋) 제작의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화성 건설을 무난히 끝마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전문가들은 서북공심돈이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원래 수원화성에는 3개의 공심돈이 설치돼 있었다.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과 함께 남공심돈이 있었다. 그러나 남공심돈은 일제 강점기 시기인 1920년대에 사라졌다. 현재에는 전하지 않아 의궤 그림과 1907년 촬영된 사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공심돈은 화성에서 새로운 성곽의 축조 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며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시설물로써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1997년이었다. 의사 김주일이 운영하는 갤러리 그림시에서 '1997 세계문화유산의 해'와 수원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 '수원시문화유산전'이 개최됐다. 수원문화원이 주최하고 갤러리 그림시와 프로젝트 호랑이가 공동 주관한 전시회로써 많은 관심을 끌었다. 수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인 임병호 김우영 정수자 송지은 김명원 이태용과 회화작가 이길범 권용택 임종길 이선열 류삼열, 사진작가 박순기 박종만 최종엽 최춘일 남기성 천병철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수원의 문화재 여섯 곳을 선정, 시와 그림과 사진으로 남겼는데 나도 '공심돈에서 술을 마셨다'란 시를 써서 참여했다.

 

시선이 가는 곳에/그게 있었다// 본질보다 더 빛나는 모양으로/대유둔 너머/여름눈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새벽/담쟁이 덩굴 속에 숨은 총안에서/생각들이 무수히 날아올라 성곽을 배회했다// "아름다움을 보지마라"//그중 한 생각이 술잔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쯧쯧쯧 아무래도 내가/그때 거기 있었던 것 같다// 날이 밝을 때까지도/마음 비우지 못하고/그와 헤어졌다


<사진> 서북공심돈에서 본 화성성곽 (사진/김우영)

<사진> 서북공심돈에서 본 화성 성곽 (사진/김우영)

몇 년 전에는 '공심돈 앞에서'란 시도 써서 한 문예지에 발표했다.

 

본래는 전생의 기억조차 없었던/무형체인 내가/알음알이로 이 면목의 형체를 지어// 꽤 오랜 날 살아왔으니/이제 그 잡스런 물건 가득한/마음 텅 비우고// 주어 목적어/수시로 형상 짓지 말 것이며/바람이나 빗방울, 구름에 순응할 것이며... // 내가 보고 들은 것은/이것이 전부/남김없이/다 토해내 텅 비었으니/다시 막걸리나 한잔 하세

 

그 사이 몇십 년의 세월이 또 훌쩍 가버렸다. 하지만 참 이상도 해라. 오늘 공심돈 안에 들어와 보니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내가 혹시 2백 몇십 년 전 이 건물을 짓던 석공이나 와장 김대노미(金大老未)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화성을 지키던 장용영 무사였을지도.


김우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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