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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안중근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김우영 언론인
2023-01-16 10:30:06최종 업데이트 : 2023-01-16 10:29:27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코로나19가 다녀갔다. 일주일간의 격리 끝에 다시 검사를 해보니 완치다. 오랜만에 벗들을 만나 막걸리도 두병 마셨다. 혹시 몰라 나름 거리를 둔 채.

 

 

그리고 오늘은 영화 '영웅'을 보러갔다. 안중근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까지의 과정, 재판에서의 당당함,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생을 마무리하는 바다 같고 태산 같은 모습까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이토히로부미는 제국주의의 선봉에서 아시아 침략에 앞장선 인물이다.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했다.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인 것이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선생에게 저격당해 죽었다.

 

 중국에 있는 뤼순감옥. 2015년 김우영 촬영

중국에 있는 뤼순감옥. 2015년 김우영 촬영 

 

 

2015년 11월 중국 다롄에서 45km 떨어진 뤼순(旅顺) 감옥을 찾았다. 해외문화재 환수운동을 하던 김준혁 한신대 교수, 그를 전폭적으로 돕던 수원의 치과의사 임병목 선생과 학자들이 동행했다. 나의 뤼순 행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김교수와 함께 해외문화재 환수운동에 열심이었던 안민석 국회의원이 급한 공무로 빠지게 됐고, 출발 이틀 전 술자리에서 내가 대타로 결정된 것이다. 초스피드로 비자를 발급받고 출국하게 됐다.

 

 

뤼순감옥은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내가 존경하는 세분이 숨졌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도 이곳에 수감됐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사진/김우영)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도 이곳에 수감됐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사진/김우영)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신채호·이회영 선생이 이곳에 수감됐다가 숨을 거뒀다.

 

안중근 선생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뤼순감옥에는 안중근 선생이 수감되었던 독방이 보존돼 있다. 그리고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재산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우당 이회영 선생,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수감됐던 방도 그 상태로 남아 있다. 안중근 선생이 죽음을 맞이했던 사형장도 재현됐다.

 

 

안중근 선생과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뤼순감옥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회영 선생은 이른바 조선 제일이란 뜻의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이었다. 선생의 일가는 나라의 위기 앞에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으며 비밀리에 전 재산을 처분해 약 40만 원의 거금을 마련했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 백 억에 달한다.

 

이회영 일가는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1년 교민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뒤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6형제가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수백억의 재산은 사라졌고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타이완 지룽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에서 6년째 복역 중 사망했다. 단재는 고대사의 정통이 단군에서 부여와 고구려로 계승된다고 주장한 역사가였으며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을 주장한 독립투사였다.

 

 

위대한 영웅들이 독립투쟁의 뜻을 꺾지 않고 숨을 거둔 뤼순감옥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특히 신채호 선생과 이회영 선생이 갇혀있던 감방과 사형장 옆에 마련된 안중근 선생의 흉상은 제법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뤼순감옥 사형장 옆에 마련된 안중근 선생 추모공간 (사진/김우영)

뤼순감옥 사형장 옆에 마련된 안중근 선생 추모공간 (사진/김우영)

 

 

나는 오래전 러시아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때 연해주 크라스키노 지역에 있는 단지동맹비도 찾아가 본 적이 있다.

 

1903년 3월 5일 안중근 선생과 11인의 동지는 크라스키노 지역에 모여 왼손 무명지(넷째 손가락)를 잘랐다.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3년 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피로 맹세했다. 그리고 그 맹세는 지켜졌다.

 

이를 기리고자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핏방울 형상의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그 장면도 영화에 나온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손가락을 끊어 맹세합시다.

 

이것을 증거로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기어이 우리 목적을 이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영화 '영웅' 관람을 권한다. 지난해 만 65세가 넘은 나는 얼결에 노인 대접을 받아 할인 혜택을 받았지만 돈을 모두 내고 봐도 절대 아깝지 않을 영화다.

 

안중근 역을 맡은 뮤지컬 배우 정성화와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 역을 맡은 김고은의 열연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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