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의 기억이다. 겨울, '한·몽 문화포럼'을 꿈꾸다 _1 한국 측 참가자들의 화려한 옷매무새는 몽골 측 참가자들의 학문적 깊이에 금방 묻혔다. 몽골 학자들의 눈은 바이칼만큼이나 깊고 푸르렀다. 행사장밖에는 한국과 몽골이 공동으로 내딛은 유라시아 문화포럼의 첫 발을 축복하듯 흰 눈이 쉬지 않고 내렸다. 포럼은 약간의 산고(産苦) 끝에 성사됐다. 그때를 살짝 들추면 이렇다. '몽골행(行) 제안'에 문인과 학자, '대부분' 좋은 마음으로 동의했다. '대부분' 그랬다. 그러나 모시기 어려웠던 분도 있었다. 몇 번의 조아림과 설득도 소용없었다. 그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을 씁쓸했다. 같이 갔던 정대기 형과 마포의 어느 흐린 주막에서 쓴 소주로 마음을 달랬다. 서로에게 주는 위로가 고작 그랬다. 그 후로 몇 번의 접촉이 있었고 결국 조건부로 "가겠노라" 하명(下命)하셨다. 감읍했다. 마침내 울란바토르 공항(현재 칭기스칸 공항)으로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 일행들이 모였다.. 상기된 얼굴과 총총한 눈망울은 설렘을 대신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전 세계를 호령하던 징기스칸의 나라에 가는 것이니. 그곳을 초원과 별, 독수리로 기억하는 나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예상은 했지만 현실이 될 줄 몰랐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겨울 몽골은 그 곳의 봄 하늘처럼 변덕스럽다. 공항방송은 울란바토르의 사정을 이렇게 알렸다. "울란바토르에 눈과 바람이 강해 오늘 비행기는 출발하지 못합니다. 내일 다시 현지 상황을 보고 출발하겠습니다." 뭐 됐다. 주최 측의 고민은 깊었다. 특히 총괄을 맡았던 내 머리위로 쥐들이 쉼 없이 왕복달리기를 했다. 당시 30명에 가까운 문인들과 문학담당 기자들을 해산 시키고 다음 날 다시 모이게 한다는 건 '이(蝨) 세 말'을 몰고 가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 셋도 어렵다는데 시인과 소설가도 계셨으니 오죽했을까. 결국 궁여지책(窮餘之策)은 이랬다. 가까운 을왕리에 펜션을 잡고 밤샘음주로 이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 후 다음날 인천공항으로 오자.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모두의 동의를 급조한 해변으로 갔다. 다행이 다음 날 비행기는 일행을 몽골로 안착시켰고 문학과 술로 버무려진 일정은 마무리됐다. 낮에는 학문적 열정이 밤에는 또 다른 열정이 '붉은 영웅' 울란바토르를 달궜다. 다시 심포지엄 당일. 연륜 깊은 한·몽 문인과 학자들의 열정은 영하 30도를 넘나들던 초원의 겨울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 열정을 옮겨 그 날의 감동을 되새긴다. "우리는 극동의 한국에서 시작해 우랄알타이 산맥를 넘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까지 이르는 문화벨트를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 우선 그 출발점인 몽골에서 한국과 몽골 사이의 문화적 공감대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유라시아 문화대장정을 시작한다."(홍태식 한·몽문학연구회 회장) "이곳 대지는 하늘 아래 세계 어느 곳보다 오랜 구전문학의 길고 긴 시대를 이어왔고, 문자로 이루어진 문학이란 구전문학의 시간에 견주면 극히 작은 시간의 문학. 하늘 속 가득 찬 바람과 비와 눈보라 그리고 몇 천 년의 햇빛 가운데 언제나 시가 살아 있는 경건한 장소에서 나의 시를 반성하려고 왔다."(고은 시인) 해마다 겨울이 오면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꿈꾼다. 수원에서 피어날 '한·몽 문화포럼'을. 고은 선생이 살고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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