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다. 230년 전에 착공한 수원화성이 도심 한가운데 그대로 있다. 수원은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다. 230년 전에 착공한 수원화성이 그대로 있다. 여기에 임금이 머물던 행궁과 정조 어진을 모신 화령전도 있다. 과거 왕의 수원 행차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림과 글로 자세히 전한다. 역사 유적과 관련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오늘날 재현 행사로 이어진다. 수원은 그야말로 역사 특례시고, 문화 특례시다. 역사를 품은 도시답게 길거리에도 유산이 있다. 도심 공간 변화로 사라진 역사가 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표지석을 남겼다. 표지석은 특정한 시기에 존재했던 공간을 확인하고 기념한다. 군청자리 표지석. 행궁 광장 건너편 후생한의원 앞에 있다. 수원시 역사가 있다. 수원미술관 뒤편 길에 예수 그리스도후기 성도교회가 있다. 이 교회 정문 왼쪽 화단에 표지석이 앉아 있다. '이아, 수원 법원, 검찰청 터'다. 화단 잡풀에 가려 잘 안 보이는데, 지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달라는 듯 반짝거린다. 내용을 읽어 보면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로 승격되면서 제2청사 이아가 있었고, 이후 구한말(1904. 4. 29.부터)과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6·25사변으로 소실 될 때까지, 그리고 1956년부터 1972년까지 수원 법원과 검찰청 청사가 있던 곳'이라고 쓰여 있다. '이아(貳衙)'는 한자 표현에서 보듯, 화성유수를 보좌한 관청이다. 정조대왕의 명으로 1793년 8월 건립됐다. 수원유수는 특별히 고위 관리를 임명했다. 초대 유수 번암 체제공의 경우도 정승급의 관리였다. 국가 고위직인 정승은 한양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아의 판관이 유수부의 실무 책임을 맡았을 것이다. 이아 표지석. 수원미술관 건너편. 표지석은 단순히 역사적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 전하는 기록물이다. 수원 법원과 검찰청 청사가 있던 곳은 교동에 있는 부국원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 검은 표지석이 있는데,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수원 법원과 검찰청 청사로 임시 사용하던 곳'이라고 쓰여 있다. 기록을 보니 여기서 '이아' 자리로 갔다. 선경 도서관 내에도 표지석이 낮게 앉아 있다. '1972년부터 1984년까지 수원 법원과 검찰청의 청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간단하게 쓰여 있다. 이아 자리에 있던 시설이 다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 포도청 자리. 북수원 성당 입구. 표지석에 큐알 코드 등 세부 정보를 넣는다면 당시 역사와 문화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이아가 있던 곳은 '경술국치' 이후 재판소와 법원 용도로 활용되고, 이후 수원 법원과 검찰청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백성의 민원을 해결하던 기관이 법을 심판하고, 수사 업무를 하는 기관으로 변신했다. 시대 흐름으로 기관 기능이 다 하고 새로운 업무를 보는 곳으로 달라졌지만, 궁극적으로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한 것은 변화가 없다. 그리고 공간을 재활용한다는 의미도 긍정적이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이 있다. 수원 법원과 검찰청이 세 차례라나 옮겨 다닌 것을 보면 안타깝다. 당시 국가 재정이 열악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행궁 광장에서 십자로 쪽에 종로 교회와 여민각이 있다. 이 사잇길에 후생한의원에 있는데, 길거리에 '군청자리' 표지석이 있다. 내용에 '1949년 수원군이 수원시로 승격될 때까지 수원 군청 자리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1970년까지 화성 군청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선경도서관 내 표지석. 수원 법원과 검찰청이 두 차례라 옮겨 다니다 여기로 세 번째 온 것이다. 수원군은 옛 행정 구역 이름이다. 당시 수원군은 화성과 오산 등까지 넓은 지역이었다. 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 군 명칭을 화성군으로 변경하였다. 이 명칭은 수원화성에서 따왔다. 1970년 6월 1일 군청사를 오산읍으로 이전할 때까지 여기가 화성군청이었다. 군청이 있던 자리는 십자로로 수원의 중심이었다. 행궁 광장이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던 곳이다. 옆으로는 팔 부잣집 거리로 상업 행위가 활발했다. 이 길을 따라 창룡문을 지나면 용인, 성남으로 가는 길목이다. 교통의 중심지로 군민을 지원하는 군청 자리로 제격이었다. 부국원 앞 표지석. 이곳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이다. 행궁 앞에는 북수동 성당이 있는데, 여기도 표지석이 슬프게 서 있다. 이곳은 '옛 포도청 자리'로 '정조대왕 사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교인들이 심문을 받고, 사형 등으로 순교한 수원 성지'라고 쓰여 있다. 포도청은 조선 시대에 범죄자를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하던 관아다. 지금의 경찰서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기도 했는데, 수원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로 끌려온 신자들은 심문을 받은 뒤 사안의 경중에 따라 목숨을 잃은 일도 있다. 표지석은 장소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만 쓰여있다. 하지만, 쓸 수 없었던 이야기도 많다. 여기에 살았던 사람 이야기가 궁금하다. 수원은 인문 도시고 문화 도시다. 도시 이미지에 걸맞은 행정이 있어야 한다. 표지석에 세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큐알(QR) 코드 등을 넣는 작업은 어떨까. 이를 통해 공간의 역사를 더 깊게 이해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소중하게 볼 수 있다. 수원, 화성, 팔달문, 행궁, 표지석, 이아, 채제공, 윤재열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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