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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혁명의 역사가 담긴 서둔동을 걸으며
축만제 호수 주변 근대 농업 탐방로에서
2024-04-02 10:23:09최종 업데이트 : 2024-04-02 13:10:43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근대 농업 탐방로. 흔히 축만제 둘레길이라고 한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근대 농업 탐방로. 흔히 축만제 둘레길이라고 한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축만제에 다시 봄이 왔다. 타래째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둘레길을 걷는다. 나무들도 저마다 봄볕과 내통해 꽃과 잎을 잉태한다. 호수 한가운데 섬은 새들의 보금자리다.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 한가롭게 지내고 있다. 흔히 둘레길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근대 농업 탐방로라고 안내판이 붙어 있다. 
  수원은 정조대왕 때 화성을 건설하고 새로운 도시로 자리했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었다. 만석거를 조성하고 인근에 대유둔 농장을 만들었다. 수리 시설과 둔전에 성공하자 다시 만석거의 3배 규모의 축만제(서호)를 만들고 서둔을 경영했다. 
여기산은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청동기 시대 집터가 확인됐고, 주거지 내부에는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었다. 농사짓기에도 적합했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산은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청동기 시대 집터가 확인됐고, 주거지 내부에는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었다. 농사짓기에도 적합했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다.


  저수지는 농경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벼농사에서 가뭄은 치명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산등성이에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만석거와 축만제는 농토 옆에 있다. 농사에 최고로 적합한 시설이었다.
  여기산이 축만제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다. 이곳은 중대백로, 해오라기, 왜가리 등이 살고 있어 야생동물 보호 구역이다. 수원시 공원녹지사업소의 협조를 얻어 탐방한다. 산에 들어가는 순간 숲 냄새가 다르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청동기 시대 집터가 확인됐고, 주거지 내부에는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런 흔적은 결국 이곳이 농사짓기에도 적합했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다.
우장춘 박사 묘. 채소 육종 및 원예 산업 발전에 공헌했다. 이곳에는 농업 혁명을 이끈 정남규 박사(초대 농촌진흥청장)와 김인환 박사(5대 농촌진흥청장)의 묘도 있다.

우장춘 박사 묘. 채소 육종 및 원예 산업 발전에 공헌했다. 이곳에는 농업 혁명을 이끈 정남규 박사(초대 농촌진흥청장)와 김인환 박사(5대 농촌진흥청장)의 묘도 있다.


  이곳에는 농업 혁명을 이끈 분들의 묘가 있다. 우장춘 박사는 채소 육종 및 원예 산업 발전에 공헌했다. 정남규 박사는 초대 농촌진흥청장으로 한국형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 체계를 정립했다. 김인환 박사는 5대 농촌진흥청장으로 통일벼 개발 및 보급으로 쌀 자급자족 달성을 실현했다. 
  축만제 벚꽃 길을 걷다가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라고 쓰여 있는 건물로 간다. 이곳이 옛 농촌진흥청이다. 위로는 2층이지만, 옆으로는 길다. 건물 형태와 하얀색이 안정감을 준다. 이마에 '농업은 스마트하게 농촌은 매력 있게'라고 쓰여 있다. 농업 분야도 첨단 과학 시스템이 중요하다. 아울러 농촌을 활발하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권업모범장과 잠업시험소 표석.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다.

권업모범장과 잠업시험소 표석.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다.


  건물로 앞 화단에 표지석들이 서 있다. 권업모범장과 잠업시험소 표석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다. 이곳은 저수지와 대규모 농토가 있는 조선 최고의 농업 시설이었다. 일제는 이곳을 식민지 농업 정책의 본거지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여기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했다. 자신들의 선진기술을 전파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길목으로 삼았다.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옛 농촌진흥청 본관이다. 위로는 2층이지만, 옆으로는 긴 건물이다. 건물 형태와 하얀색이 안정감을 준다.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옛 농촌진흥청 본관이다. 위로는 2층이지만, 옆으로는 긴 건물이다. 건물 형태와 하얀색이 안정감을 준다.


  축만제 주변은 정조대왕이 농업의 기틀을 다졌다. 일제는 이를 이용해 식민지 농업 정책을 펼쳤다. 해방 이후에는 여기서 농촌진흥청이 설립됐다. 정조대왕의 뜻을 이어 농업 정책을 주관하는 역사를 열었다. 
  농촌진흥청은 육종 연구 등으로 한국 전쟁 이후 식량난 해결에 노력했다. 통일벼의 개발 및 보급으로 쌀 자급자족 시대를 열었다. 그 후에도 우리나라 농업발전은 물론 아프리카 식량난 해소 등 인류의 먹거리를 위해 혁신적인 농업 기술에 힘을 쏟고 있다. 2014년에는 공기업 이전 정책에 따라 전북 전주시로 이전했다. 
과거에 농민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농민회관이었다. 현재는 결혼식장이 있고, 농업인 신문, 농촌지도자 중앙연합회 등 농업 관련 단체도 상주해 일하고 있다.

과거에 농민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농민회관이었다. 현재는 결혼식장이 있고, 농업인 신문, 농촌지도자 중앙연합회 등 농업 관련 단체도 상주해 일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떠났지만 서둔동은 여전히 농업 중심지의 상징성을 잇고 있다. 이곳에 국립농업박물관이 자리했다. 박물관은 유물 전시보다 농업의 가치와 미래 먹거리의 중요성을 알리는 복합문화공간 역할을 한다. 
  농촌진흥청이 떠난 자리에는 박물관 외에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농진중앙회 등 농업 관련 시설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농업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수원시공원녹지사업소, 더함파크, 선거연수원 등 공공 기관도 입주했다. 운동장은 어울림 마을 정원으로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공원 역할을 한다. 
  축만제가 황구지천으로 흐르는 물길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있었다. 수원농림학교가 서울대 농대로 승격해 자리하고 있었다. 2003년에 서울 관악 캠퍼스로 이전했지만, 한국 농업의 인재를 배출하며 농업 현대화에 이바지했다. 
농촌진흥청은 떠났지만 서둔동은 여전히 농업 중심지의 상징성을 잇고 있다. 이곳에 국립농업박물관이 자리했다.

농촌진흥청은 떠났지만 서둔동은 여전히 농업 중심지의 상징성을 잇고 있다. 이곳에 국립농업박물관이 자리했다.


  축만제 초입에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이마에 결혼식장 간판을 달고 있다. 들어가 보니 전국의 농민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농민회관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71년만 해도 농업은 국가 산업의 중요한 영역이었다. 해서 회관 건립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이뤄졌다. 인근에 농촌진흥청이 위치했으니 농업 기술 등을 교육하는 데 적합했을 것이다. 
  1971년이면 수원은 고층 아파트도 없던 시절이다. 논밭만 있는 곳에 10층 건물이었으니 꽤 큰 건물이었다. 전국에 농민들이 여기 농민회관에 와서 먹고 자고 했으니 고향에 가서 자랑하지 않았을까. 이 건물에는 여전히 ㈜농업인 신문, 농촌지도자 중앙연합회, (사)한국농촌발전연구원 등 농업과 관련된 조직들이 일하고 있다. 
축만제 주변은 오랜 시간 형성된 자연환경으로 시민들이 풍요로운 여가 생활을 즐기는 공간이 됐다.

축만제 주변은 오랜 시간 형성된 자연환경으로 시민들이 풍요로운 여가 생활을 즐기는 공간이 됐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뜻에 맞게 축만제는 지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시험답에 용수원으로 사용한다. 화성 서쪽에 있다고 서호로 부르기도 했는데, 호수에는 철새들도 많이 찾아온다. 호수를 도는 둘레길은 시민들이 걷기 운동을 한다. 물가에 철 따라 피는 꽃이 예쁘고, 오랜 세월 커온 나무도 멋지다. 아무 때나 찾아와 느리게 걸어도 어느새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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